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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의 부흥 김나래 2024-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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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 7.

 

* 본 문 : 신명기 10장 19절 말씀

* 제 목 : 선교의 부흥

 

오랫동안 준비했던 나바호 Coppermine Full Gospel Church의 여성 리더쉽을 세우기 위한 훈련과 교제의 시간을 마쳤습니다.  기대하고 준비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시간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생각과 은혜를 경험했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부족함을 채우시고 더 좋은 것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황선교사님과 의논해서 일정을 정했지만 상황에 맞지 않는 일들이 있어서 일정을 변경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둘째 날 오후 프로그램이 대표적이었습니다.  그 시간은 원래 Retreat이 열리는 교회당에서 벗어나서 관광지인 ‘세도나’를 방문하고 걷고 쉬면서 자연스러운 교제를 하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참여했던 원주민들이 세도나를 여러 번 방문한 경험이 있고, 시간적으로도 왕복 4시간이 걸리는 상황이어서 계획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좀 늦은 점심 식사를 하고 교회당으로 돌아왔을 때 그 교회를 섬기는 목사님이 그리 멀지 않은 한 장소를 추천했습니다.  'Goldmine'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웹사이트를 들여다보니 꽤 매력적이었습니다.  가는데 30분, 즐거운 마음으로 그곳으로 갔습니다.

 

꽤 잘 꾸며지고 준비된 곳이었습니다.  반나절 정도는 즐겁게 관광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잘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서부 개척 역사와 함께 1800년대 중반에 건설된 마을이었고, 그 마을 앞에 버티고 있는 Superstition Mountain과 그 주변에서 금광을 개발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서부영화에서 보던 서부의 노다지 금광을 차지하기 위해 개발했던 마을이었습니다.  금광이 폐광된 후 1930년에 Ghost Village가 되었고, 폐쇄되었다가 1980년에 관광을 목적으로 재건설되었다고 했습니다.  기차를 타고 한 15분 마을을 둘러볼 수 있었고, zipline도 있었고, 금광탄광 체험을 할 수 있는 코스가 있었습니다.  마을로 꾸몄지만 대부분 기념품을 파는 곳이었고, 교회당이나 작은 교도소도 있었습니다.  다 함께 기차를 타고 마을 주변의 풍광을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두 만족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녁에 돌아와서 그날 있었던 일을 평가하기 전에는 말입니다.

 

1. 당신은 우리를 아는가?

 

하루 프로그램을 마치기 전 그날 일들을 돌아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오늘 서로 교제하고 함께 식사하고 토론했던 일들에 대한 생각들을 나눴습니다.  대부분 피드팩이 좋았습니다.  자신들을 위해서 준비하고 헌신한 스탶들에 대해서 감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좋은 것이 좋은 것으로 넘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참석자 중에서 Coppermine에서 약 2시간 거리인 Dilcan이라는 마을에서 목회를 하는 Veronica(가명)는 그날 오후에 계속 표정이 안좋았었습니다.  몸이 좋지 않은가 생각했었습니다.  그녀가 입을 열었습니다.  자신은 오늘 저녁에 정말 마음이 좋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관광했던 Goldmine은 원래 Apache의 땅이었습니다.  아파치 원주민들은 서부개척의 역사와 함께 쫓겨나고 수탈당하고 학살당했습니다. 그들이 조상 때부터 신성하게 여겨왔던 Superstition Mountain은 노다지를 꿈꾸던 백인들의 욕망과 탐욕의 광산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더 이상 금이 나오지 않자 산은 폐광으로, 북적대던 마을은 Ghost Village(유령마을)가 되었습니다.  Veronica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관광지에서 잠시 즐기고 좋아할 수는 있지만 알고보면 그들의 조상들이 피 흘리며 지키고자 했던 땅이며 그들의 조상의 조상이 뼈와 살을 묻었던 곳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쫓겨났는데 지금은 그 후손들이 돈을 주고 관광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신은 결코 즐길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선교를 하겠다고, 같은 마음을 품자고, 우리는 형제이며 이웃이라고, 우리가 너희의 아픔을 잘 이해한다고 말해왔습니다.  초대교회하면 나바호 선교이고, 이응도 목사하면 나바호 선교입니다.  하지만 너무 쉽게 드러나버렸습니다. 여전히 저는 생각이 부족합니다. 섬세하게 그들의 마음을 품지 못합니다.  선교에 대한 낭만적 정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그들과 그들의 조상의 땅에서 바빴던 몸과 마음을 쉬면서 생각을 정리합니다.  좋은 선교를 하기 위해서 좋은 마음과 생각을 더 다듬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선교하기 위해서 사람의 땅에 사람보다 낮은 모습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우리의 선교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2. 정복 vs. 정착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의 가나안에서의 삶의 시작은 한편으로는 정복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착이었습니다.  신학자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이주를 정복으로 볼 것인지, 정착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했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이 두 가지를 함께 지지하고 있습니다.  

 

정복의 관점에서 가나안 이주를 생각하다보면 하나님은 참 잔혹하신 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로 민수기와 여호수아에 정복의 관점을 지지할 수 있는 기록이 많습니다.  가나안에는 오랫동안 살고 있는 대표적인 일곱부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을 쫓아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뜬금없고 황당한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고, 그들의 후손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들은 약속의 대상이 아니거니와 책임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허다한 많은 족속들이 가나안을 자신들의 약속의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을 쫓아내려고 합니다.  어떤 족속은 싸웠고, 어떤 족속은 항복했고, 어떤 족속은 타협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가나안 이주를 정착의 관점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사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가나안 족속들을 다 몰아내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정복을 끝낸 뒤 땅을 분배한 것이 아니라 땅을 분배한 후에 정복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요단강 서쪽의 땅에 대해서 동쪽을 먼저 정복했던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므낫세 절반 지파 외에 아홉 개 반 지파는 분배 후에 정착을 시도합니다.  전쟁은 길어졌고, 오랜 시간 분배받은 땅에 발조차 디디지 못했던 지파도 있었습니다.  가나안 이주는 오랜 기간 정착의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주장 중에서 어느 것이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을까요?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정복한 것일까요?  가나안에 정착한 것일까요?  실은 이 두 가지 주장이 다 근거가 있습니다.  광야 40년 간 땅과 자유에 굶주렸던 이스라엘의 가나안에 대한 열망이 하나님의 뜻과 만나서 정복을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광야 곳곳에 숨어 있는 가나안 원주민들을 소개하는 일은 어려웠고, 요단강 건너편 땅을 정복하는 일은 더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기는 했지만 이미 일부는 정착을 시작했고, 일부는 전쟁의 의지를 상실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정착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때로 가나안 족속들과 동화되고 때로 가나안보다 더 악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가나안의 우상과 가치와 삶의 방식이 이스라엘을 물들였습니다.  정복과 정착이 함께 이루어진 것입니다. 

 

3. 역사적 관점 vs. 선교적 관점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진술입니다.  때로는 꽤 역사적이면서 때로는 사람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표현합니다.  사람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의 적용을 우리는 선교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이주는 역사적 관점으로 보는 것이 옳을까요?  선교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옳을까요?   

 

이스라엘의 가나안 이주는 분명 역사적 사실입니다.  사람의 역사는 안타깝게도 때로는 불합리하고 정의롭지 못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는 이유로 수백수천년간 살던 땅에서 나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합리적이지도, 정의롭지도 않습니다.  사실 이 명령은 이미 시작에서부터 어그러졌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에서부터 이스라엘이 허다한 많은 족속과 함께 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너희와 함께 거류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 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거류하는 이방인에게 이 법이 동일하니라 하셨으므로”(출 12:48-49)  이미 그들 안에는 함께 거류하는 타국인이 있었습니다. 갈렙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는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으로 소개됩니다.  그니스, 혹은 그나스는 가나안에 살던 부족 중 하나입니다.  그가 아마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애굽의 노예가 되었을 것이고, 함께 출애굽하여 유다지파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가니안 원주민이 유다지파가 되었을까요?  원칙이 제시됩니다.  신앙을 고백하고 율법을 지키면 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이주하고 난 이후의 성경의 기록은 이러한 과정의 반복입니다.  이 과정은 첫 번째는 전쟁이라는 방법으로 표현되었지만 알고 보면 이미 그들 안에 이방인들이 들어와서 동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그들이 가나안에 정착해야 했고 전쟁의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내용적으로는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동화되는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과정에서 원칙을 정하십니다.  핵심은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입니다.  같은 혈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같은 신앙을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거하는 이방인들, 혹은 가나안으로 들어오는 이방인들을 어떤 마음과 태도로 대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 원칙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이스라엘 또한 나그네였던 적이 있고, 역사적 약자였던 적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대할 때 마치 자신의 과거를 만나듯 이해하고 포용하고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그네를 사랑하라!  너희도 나그네였다.”(신 10:19)는 말씀은 가나안 정착의 시대를 이끄는 시대정신이었습니다.  

     

4. 선교의 부흥

 

하나님은 선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적용시키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독생하신 아들 예수를 통해서 표현됩니다.  그는 하나님이었지만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품은 유일한 한 사람이 되어서 그 뜻으로 살고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땅에 대한 선교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교의 핵심이론이자 방법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정착하여 함께 살아가는 것이며, 세상을 하나님의 뜻으로 설득하여 가나안이 이스라엘이 되게, 세상이 교회가 되게,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만드는 일입니다.  이것은 선언적으로는 정복이며 역사적으로는 정착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의미에서 정복이며, 교회가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의 이웃이 되는 의미에서 정착입니다.  이 선교의 원칙과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세상을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보다 낮은 곳으로 가서 세상을 떠받들어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야 합니다.  이 일을 교회가 감당하려 할 때 하나님은 이전 가나안의 정복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원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출애굽했던 이스라엘에게 수많은 타국인들이 함께 있었던 것처럼 이미 우리는 세상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아니 사실 우리가 갈렙같은 타국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 되게 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가 되어 세상을 만납니다.  우리가 그 사랑과 은혜를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음을 기억하고, 우리가 오직 그 사랑과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기억하고 그들을 더 낮은 곳에 섬기고 받들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하셨던 그 일을 이제 우리가 주님의 편에서 함께 세상에 대해 감당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처럼 된다는 것은 그들을 한국교회가 되게 하거나 잘 사는 미국사람을 만든다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같은 원리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교이며 오늘날 우리가 만나야 할 선교의 부흥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잘 할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이 일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제가 설교의 서론에서 고백한 것처럼 우리는 참 쉽게 어리석어지고 교만해지고 게을러집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종의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길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우리 주님과 같은 마음과 삶으로  선교의 부흥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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