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교회 | 김나래 | 2024-01-14 | |||
|
|||||
‘한스 큉’이라는 독특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스위스 출신이고 카톨릭의 사제였습니다. 그는 카톨릭의 교회와 신학이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그는 교황의 무오류성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고, 그 결과 교황청에 의해 카톨릭 신학교에서 신학을 강의하는 것이 금지되기도 했습니다. 그가 쓴 책 중에서 가장 많이 읽힌 책은 ‘교회론’입니다. 그의 책에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허락하신 교회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그는 먼저 “교회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양파를 벗기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양파의 껍질을 한 겹씩 벗기다보면 결국 남는 알맹이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버려진 양파 껍질들이 양파 아니겠습니까?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들을 다 제거하고 본질을 찾다보면 교회의 연약한 부분과 부족한 점들을 제거하게 될텐데.... 그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신 지상교회의 현실적인 모습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를 이상적인 생각만으로 접근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이상적인 교회는 지상의 교회에 없습니다. 교회의 이상적이지 않은 모습들의 껍질들을 벗기다보면 결국 알맹이 없는 교회가 되고 맙니다. 벗겨낸 모든 껍질이 지상의 교회의 모습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예를 듭니다. 1세기 초대교회를 이상적 교회로 보고 그때의 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교회는 각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면서 그 시대가 가지는 한계들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또한 그 시대의 교회가 가진 연약함과 부족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스 큉은 교회는 사람의 역사 안에 있으면서 현재의 상황에서 출발하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미래의 비전을 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그는 재미있는 질문을 한 가지 던집니다. “당신은 교회를 믿을 수 있는가?” 그는 먼저 아니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교회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관계를 만드실 때 가정과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피조물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연약함이나 부족함을 발견할 때 너무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유일한 관계가 교회이어야 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보며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기대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스 큉은 교회를 무엇이라 설명할까요? 그는 교회의 뿌리는 예수님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그 뿌리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공동체가 자라나서 교회가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교회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애가 없다면 교회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시작한 공동체는 예수의 생애를 교회의 오늘의 삶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믿음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한스큉이 말하는 교회입니다.
1. 아름답다는 말
한 때 우울증에 빠진 적이 있었던 한 연예인이 자신에게 위로를 주었던 한 단어를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단어는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어떻게 살면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름답다는 말의 어원에 접근하게 됩니다. 아름답다는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학자들은 아름답다는 말의 어원을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첫째는 ‘아름답다’라는 형용사는 아마도 ‘알음’이라는 명사에서 왔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즉 ‘알다’(知)라는 동사에 명사형 접미사 ‘음’이 붙어서 ‘알음’이 되었고, 그 명사에 ‘답다’라는 형용사를 만드는 접미사가 붙어서 ‘알음답다’, ‘아름답다’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대상의 본성이 드러날 때 그것이 가장 적합하고 좋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살다보면 나의 본질적 가치가 드러나지 않고 환경에 의해 흐트러지는 현상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창조적 본성이 나타날 때입니다. 두 번째는 15세기 문헌 석보상절에서 찾습니다. 석보상절에서는 ‘아답다’는 표현을 씁니다. 여기서 ‘아’는 ‘我’ 즉 자아를 말합니다. 자신답다는 겁니다. 석보상절에서 ‘아’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사(私)’의 뜻에 가깝습니다. 모든 개인이 각각 자신이 가진 개성과 특질을 따라 살고 일할 때 가장 아름답고 가치있다는 뜻입니다.
그 연예인은 아름답다는 말의 어원에서 큰 위로를 얻습니다. 나는 언제, 어떻게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내가 내 삶에 부여된 가치와 목적을 찾아서 발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서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나는 아름다운 사람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자신다울 때, 내가 나 다울 때, 성도가 성도답고, 교회가 교회다울 때....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교회와 성도와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2. 초대교회의 교회다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짧은 구절을 통해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워하는 많은 설교자들과 성도들이 이 말씀을 통해서 교회의 원시적 역동성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아직 체계적인 조적을 갖추기 전에, 아직 성경과 신학이 온전히 구비되기 전에 오직 복음과 순종하는 믿음만으로도 역동적이고 생산적인 교회로 세워지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원시적이면서 완전한 교회의 모습은 다음 4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교회는 예배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초대교회는 힘써 모이고 함께 예배하기를 기뻐했습니다. 모이기를 힘쓰고 함께 예배로 하나님과 교통했습니다. 물론 한 성도, 한 가정이 교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성도들을 부르셔서 함께 모이게 하시고 서로 지체가 되어서 몸된 교회를 구성하게 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예배에 있습니다. 예배를 상실한 마음, 예배를 상실한 관계, 예배를 상실한 섬김은 모두 무의미합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하기 때문에 때로 교회로 모이나 예배의 마음과 삶을 상실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중심을 상실한 모든 섬김과 성과와 관계는 무의미합니다.
2) 성도의 관계와 교제가 곧 교회입니다.
성경은 이 원리를 오직 하나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엡 2:21)라고 표현했습니다. 교회는 함께 모이고 연결하여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목숨 걸고 예수를 믿어야 했던 시대에 함께 모여 서로를 격려하며 교제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했던지를 설명합니다.
3) 교회는 서로 돕고 구제합니다.
초대교회는 ‘두려움’을 공통의 정서로 하고 있었습니다. 43절에 보시면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이 두려움이 세상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NIV에서는 이것을 'AWE'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은 경외감, 경건한 두려움으로 번역됩니다. 그들은 핍박과 고난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세상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경외심과 놀라움을 가졌습니다. 그들이 세상을 두려워했다면 모일 수 없었을 것이고, 가난하고 궁핍한 시대에 구제에 대한 마음의 여유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놀라운 마음으로 지켜봤습니다. 그들은 물건을 통용하고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고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돕는 교회가 초대교회였습니다.
4) 교회는 선교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는 아직 선교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확장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최선을 다하여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고백한 신앙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는 부흥과 선교로 나타났습니다. 날마다 모이기에 힘쓰고, 최선을 다해서 서로 섬기며 교제하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며 이웃을 구제하고 도왔을 때 복음의 능력이 교회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부흥과 선교로 나타났습니다.
3. 교회의 회복
아시는 대로 2024년 1월의 우리 초대교회는 좀 어렵습니다. 서로 말씀들을 하지 않으시겠지만 마음들이 무거우리라 생각합니다. 2024년의 교회의 표어는 회복과 부흥인데, 모두 같은 질문을 마음에 품으실 겁니다. “어떻게?”와 “무엇을?”에 관한 질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무엇을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교회가 부흥의 길로 갈 수 있을까? 무엇을 하면 교회는 아름답고 건강한 교회로 회복될 수 있을까...하는 질문들을 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답은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교회는 언제 가장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교회가 교회다울 때입니다. 교회의 교회다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도행전의 본문은 우리에게 좋은 예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길을 잃을 때, 우리가 자신이 없을 때 우리를 바른 길에서 회복하게 하는 지도와 같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뿌리내리고 있는가? 그 신앙으로부터 출발한 공동체인가? 만일 그렇다고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는 4가지 초대교회의 표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첫째, 우리는 예배에 최선을 다하는 교회인가? 성도들은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고 있는가? 둘째,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교회인가? 나는 다른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 얼마나 시간과 감정과 재정을 사용하고 있는가? 셋째, 우리는 시대와 이웃을 돌아보는 교회인가? 나는 지난 한 달 ‘구제’라는 이름으로 나의 시간적, 정서적, 물질적 자산을 얼마나 사용하고 있는가? 넷째, 우리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어떻게 헌신하고 있는가? 내가 교회라는 이름 뒤에 숨지 않고.... 성도 각자가 스스로의 시간과 삶과 재정을 사용해서 구제하고 선교하는 일에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함께 모여 교회이며 나 자신과 가정이 또한 교회입니다. 교회가 하니까 나는 교회의 이름 뒤에서 숨는다면.... 내가 좋은 교회가 아니므로 함께 모이는 교회 또한 좋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많은 이유로 교회의 어려움을 설명할 수 있고, 원망이나 책임을 물을 수 있겠으나 교회의 교회다움은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 본질의 회복에 있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무엇을 하면 교회의 교회다움을 회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아주 기본적이고 어쩌면 건조할 수 있는 대답을 오늘 본문이 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뿌리를 확인하고, 예배와 교제와 섬김과 선교에 헌신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4. 교회다움, 아름다움
저는 한스큉이 말했던 양파의 벗겨놓은 껍질에 대해 많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양파의 본질을 찾겠노라고 껍질을 벗기고 또 벗기면 결국 푸른 심만 남거나 그것조차 없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사람이 모이는 지상의 교회는 수많은 껍질들로 싸여 있습니다. 그 껍질들을 벗길 때마다 이유가 있고 설명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이 소개하는 사도행전의 교회도 헬라파 과부들과 히브리파 과부들의 다툼이 있었고, 아나니나와 삽비라는 책망받아 죽음에 이르렀고, 유대주의자들이 발흥하여 복음의 전진을 가로막았으며, 곧 바울파니 베드로파니 아볼로파니 예수파니 하는 분파로 갈라지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초대교회 당시에도 이상적 관계와 교회를 꿈꾸며 자신들이 평생 믿어왔던 종교를 버리고 신앙을 고백하며 교회로 들어왔던 많은 성도들이 초대교회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던 양파껍질에 실망하고 돌아섰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상의 교회는 그렇게 성장해왔습니다. 교회를 믿을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지상에서의 교회와 성도는 여전히 베드로의 연약함과 바울의 부족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와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은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이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아름다움을 이 세상에서 보여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의 연약함에 대해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이요, 성도들의 부족함에 대해 성령 하나님이 채우실 것입니다.
2024년에 하나님의 거룩하고 자비로운 인도하심을 사모합니다. 우리 초대교회가 지상에 세우신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회복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교회의 아름다운을 회복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주시는 부흥의 시대를 열어가는 초대교회와 성도들과 가정의 2024년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