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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4일 주일예배 - "마음의 부흥" 김나래 2024-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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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보면 대부분 교회당이나 집에 서양의 유명화가들의 그림이 걸려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기도하는 손’이나 어린 사무엘이 기도하는 모습, 최후의 만찬 등이 기억납니다.  여러분들도 이 사진들을 보시면 아... 하실 겁니다 (사진 1-6)  대부분의 그림들이 성경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신앙적이지 않은 것 같은 그림들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밀레의 ‘만종’과 ‘이삭줍는 여인들’(그림 7,8) 같은 그림이 있었습니다.   

 

밀레는 농민화가라고 불렸습니다.  그 자신이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환경에서 자랐고, 무명작가로 한참 작품활동을 할 때에도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가 작품활동을 하던 1850년대의 프랑스는 시민혁명이 일어나서 왕이 쫒겨나고 공화정이 시작되었던 시기입니다.  땅을 소유하고 있던 지주들과 소작농으로 일하던 농민들의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했던 밀레는 자신의 생활을 그림으로 옮겼습니다.  자신이 보고 느끼고 경험했던 것이 그림으로 나왔습니다.  밀레의 ‘만종’을 보면 부부가 노을 진 들판에서 하루 일을 마치고 기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평화롭고 거룩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밀레가 이 그림을 처음 그렸을 때, 부부 사이에 놓인 감자 바구니에는 감자가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감자바구니가 아니라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부부의 아기의 관이었습니다.  지금 부부는 하루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배고파 죽은 아기의 장례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밀레 주변에 그렇게 아기를 잃은 가정이 있었던 것 같고, 밀레는 함께 눈물을 흘리며 이 그림을 그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그림을 본 한 친구가 그렇지 않아도 시골풍경에 가난한 농부들의 삶을 그림으로 그려서 비판을 많이 받던 밀레가 또 이런 그림 때문에 곤란함을 겪을 것을 걱정해서 밀레를 설득합니다.  밀레는 아기 그림 위에 감자를 그려넣었습니다.  비참하고 눈물 나는 그림이 경건하고 낭만적인 그림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1. 이삭을 줍는 여인들

 

‘이삭을 줍는 여인들’이라는 그림도 생각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여인들은 꽤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하루 종일 저 넓은 들판에서 이삭을 주웠을 것입니다.  이 여인들의 뒤편에 그림의 배경이 되고 있는 풍경을 보시면 이 여인들이 왜 그렇게 힘들어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말을 타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곡식들이 있습니다.  여인들을 왜 저렇게 산더미처럼 곡식을 쌓아놓은 추수한 들판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고 있을까요?  저 여인들과 그들의 남편이 일년 동안 부지런히 땀 흘려 노동했지만 저 쌓아놓은 곡식들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추수한 곡식의 대부분을 지주들이 가져가고 여인의 가족들은 1년을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아주 적은 곡식을 노동의 대가로 받아야 했습니다.  저렇게 들판에 나가서 남아 있는 이삭이라도 줍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던 비참한 현실이 밀레가 살아야 했던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모습이었습니다.  

 

밀레는 고민합니다.  성경에 자신이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룻기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밀레는 룻기에 나온 보아스의 들판을 생각하며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들판에 남은 이삭을 줍는 일, 19세기 프랑스의 현실에서는 참으로 비참한 일이었는데 사사기의 시대, 보아스의 들판에서 이삭을 주웠던 룻에게는 이것이 은혜였습니다.  같은 풍경인데.... 전혀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는 이 그림을 통해서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고 믿음 가운데 살기를 원하는 새로운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2. 남겨두라!

 

사사기의 시대를 살았던 한 가족의 여정을 보여주는 룻기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때 주셨던 명령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출애굽한지 400년 가까이 지나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명령들을 거의 잊고 살았습니다.  그 중 하나는 당시 노동을 통해서 가정을 부양하고 외부로의 위협에서 가정을 지켜야 하는 가장이 질병이나 사고, 혹은 전쟁으로 가족을 남기고 죽었을 때 가장 가까운 친족이 그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책임을 지는 일이었습니다.  ‘기업을 무르는 법’이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남성이 또 다른 한 여인을 취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여인과 함께 하는 가족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책임과 그 여인의 가족에게 허락된 기업을 그 여인의 자녀가 물려받을 수 있도록 법적인 보호자의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 하나 거의 잊혀지고 있던 법은 레위기와 신명기를 통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 15:11)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23:22)  

 

하나님은 사람의 연약함을 잘 아시는 분입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여러 상황 속에서 가난과 궁핍함이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자신의 이웃의 가난과 궁핍함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신명기에서는 “네 손을 펼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레위기에서는 구체적인 방법 중 하나를 제시했습니다.  추수할 때에 밭 모서리까지 다 베지 말고 남기라는 것입니다.  혹시 떨어지는 것이 있어도 줍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과 목적을 따라 사용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와 그리고 들짐승들을 위해 남겨야 합니다.  

 

룻기의 아름다움은 잊혀지고 희미해진 이 법들을 지키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의 시대는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각기 자기 욕심과 소원대로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키기를 원했던 소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비롯 이방인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룻과 보아스는 잊혀지고 희미해졌던 이 두 가지 법을 지켰습니다.  특히 보아스는 추수하는 일꾼들에게 일부러 곡식을 떨어뜨려놓으라고 말합니다.  먼 모압 땅에서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는 한 가난한 여인이 자신의 밭에서 충분히 추수에 해당하는 넉넉한 곡식을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배려하는 마음, 남겨진 곡식에 하나님의 은혜와 법이 뿌리를 내립니다.  사사기의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의 곡간을 채우고 나의 욕심을 만족하게 하려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자리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비워두고 남겨둔 자리에 말씀의 씨가 뿌려지고 은혜의 나무가 자라며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이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3. 까치밥 기억과 '유재'(留齋)

 

지난 주일 주보에 실었던 칼럼을 보셨을 겁니다.  몇 년 전 늦은 가을에 남장로님 댁 앞을 지나다가 앞 마당 감나무 가지 끝에 여전히 감이 띄엄띄엄 매달린 것을 보았습니다.  왜 감을 다 따지 않았는여 여쭈었더니 남장로님의 대답이 멋있었습니다. 

 

“새들도 먹어야 하고, 지나가는 이웃들도 예쁘게 감이 열린 것을 보고 즐겨야 하니까요.”

 

생각해보니 그랬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늘 유실수의 과일을 조금씩 남겨두었습니다.  초겨울까지 가지 끝에 매달린 과일들을 조상들은 ‘까치밥’이라 불렀습니다.  얼마나 정이 있고 멋이 있는지 모릅니다.  다 거두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것보다 넉넉한 마음으로 새들에게, 이웃에게, 나그네들에게 돌려주는 마음에 멋과 정이 넘칩니다.  이런 까치밥의 정서를 시로 남긴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 명필로 남아 있는 추사(秋史) 김정희입니다.  그는 제자였던 ‘남병길’에게 그에게 '유재'(留齋)라는 호를 주고 현판을 써서 선물합니다.  '유재'(留齋)라는 말의 뜻은 ‘남김이 있는 집, 남김을 두는 집’입니다.  그는 제자의 호를 소재로 삼아 이렇게 시를 썼습니다.  

 

'유재'(留齋) / 남김을 두는 집.

 

다 쓰지 않은 기교를 남겨서 조물주에게 돌려주고,(留不盡之巧, 以還造化)

다 쓰지 않은 녹을 남겨서 나라에 돌려주고,(留不盡之祿, 以還朝廷)

다 쓰지 않은 재물을 남겨서 백성에게 돌려주고(留不盡之財, 以還百姓)

다 쓰지 않은 복을 남겨서 자손에게 돌려주라.(留不盡之福, 以還子孫)

 

‘까치밥’이나 '유재'(留齋)와 같은 ‘자발적 남김과 나눔’에 대한 생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과 성경적인 사고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입성을 준비할 때 ‘까치밥’에 대한 명령을 주셨습니다.  소외되기 쉬운 사회적 약자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많이 추수하고자 하는 욕망, 자신의 곡간을 더 많이 채우고자 하는 욕망을 이기고 이 말씀을 지킬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와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비어 있는 곡간의 자리, 곡물을 남겨둔 들판에 공동체의식이 자라고,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고, 하나님의 언약이 열매 맺었습니다.  그 증거가 룻과 나오미이며, 다윗의 혈통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그들의 욕망의 곡간을 채우는 일에 삶을 소비하고 들판에 남겨져야 할 사랑과 은혜를 자신을 만족하는 일에 사용하고 저장했을 때.... 공동체는 무너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무너졌으며 그들 스스로 부패하며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4. 마음의 부흥을 꿈꾸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새 나라와 땅을 허락하시면서 그들의 풍요만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삶에 가난과 궁핍이 발생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가난과 궁핍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겠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뿐 만이 아닙니다.  삶의 어려움은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환경에서 찾아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삶에 빈 들은 늘 있기 마련이고 그곳에서는...... 경제적이든, 관계적이든, 영적이든 남겨진 이삭을 주워야 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그 빈들에서 갈급한 모습으로 헤매는 이웃들에게 우리가 비워주고 남겨주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곡간만을 채우려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자신의 유투브를 만들면서 꽤 유명한 인 플루언서로 살고 있는 ‘마크 맨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평소에 한국에 대해 많이 궁금했습니다.  한국을 여행하고 왜 이 작은 나라가 갑자기 세계 문화의 중심이 되었는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식민과 전쟁의 상처에서 회복되어 세계 10위권의 강국이 되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는 한국을 여행하고 난 다음 영상을 만들었는데 제목을 이렇게 잡았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를 여행했다”  

 

그는 한국에 가서 많이 놀랐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친절하고 성실하고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습니다.  거리는 깨끗하고 밤에도 안전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모든 나라들 중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들이며, 가장 우울감이 높은 나라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완벽주의자’라는 말을 많이 쓰고 좋아한다는 겁니다.  그가 본 한국은 유교와 자본주의의 나쁜 점만 뿌리내린 사회였습니다.  1등을 해야 하고, 100점을 맞아야 합니다.  미국인들에게 행복의 기준을 물으면 첫째 건강 둘째 대인관계, 셋째 경제적 안정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에게는 행복의 기준은 단 하나였습니다.  경제적인 만족이었습니다.  채워야 하고 쌓아야 하고 성취해야 한다는 겁니다.  100을 채워야 만족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단기간에 많은 것을 성취해냈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전통적인 공동체성이 흔들리고 있으며 가장 우울하고 불행한 나라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민 사회는 다를까요?  이민교회의 성도들은 다를까요?  우리의 기도의 제목과 관심을 살펴봅시다.  우리 또한 우리의 곡간이 채워지지 않아서 불안하지는 않은가요?  우리 또한 더 많은 것, 더 높은 곳, 더 빼곡히 채우고 싶은 마음으로 분주하지 않을까요?  내 마음과 삶에는 다른 사람들의 삶이 깃들 수 있는 빈 들판이 있을까요?  그 빈 벌판에는 그들을 위해 남겨놓은, 그들과 함께 나눌 나의 시간, 감정, 재물, 나의 소중한 것들을 자리잡고 있을까요?

 

저는 오늘 우리 초대교회 성도들의 마음에 넉넉한 이삭이 남아있는 보아스의 들판이 들어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일러주신 까치밥의 마음이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남장로님이 보여주신 넉넉하고 멋진 마음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추사 김정희가 제자에게 당부했던 '유재'(留齋)의 삶에서 교훈을 얻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신 ‘남김과 배려의 원리’가 우리의 삶의 상식이 되고 습관이 되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서로에게 복이 되고 쉼이 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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