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신앙' | 김나래 | 2024-02-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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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2. 18. * 본 문 : 다니엘 4장 18-23절 말씀 * 제 목 : 그루터기 신앙 지난 주에 다니엘서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느부갓네살이 꾸었던 첫 번째 꿈, 큰 신상이 뜨인 돌에 의해서 무너지고 그 돌이 태산처럼 크게 되어서 온 세상에 가득 찬 나라가 되는 꿈이었습니다. 이 꿈을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다니엘서라는 성경이 왜 역사서가 아니라 계시서인지, 우리 안에서 우상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역할을 하는지, 우리의 생활과 신앙 속에 자신을 우상화하려는 위험성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함께 고민했습니다. 여러분께 지난 주 말씀을 기억하면서 한 가지 더 질문을 드립니다. 꿈 속에 나타났던 큰 신상과 그것을 깨뜨리는 돌 - 성경이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큰 신상이었을까요? 돌이었을까요? 네, 당연히 신상을 깨뜨리고 세상을 가득 채운 돌입니다. 누구를 상징한다고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왕으로 하여금 이 꿈을 꾸게 하시고, 그를 통해서 온 세상 사람들이 알게 하셨습니다. 포로로 잡혀가서 자신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하나님의 회복과 부흥을 눈물 흘리며 사모하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향한 소망을 견고하게 품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세상 속에서 먼지처럼 살아가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계획을 깨닫고 소망을 붙들게 됩니다. 이것이 계시서로서의 다니엘의 역할이며 오늘날까지 그 역할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1. 또 하나의 상징 재미있게도 다니엘서에는 느부갓네살의 또 하나의 꿈이 등장합니다. 오늘은 우리 성도들이 일반적으로 첫 번째 꿈에 비해서 많이 주목하지 않는 두 번째 꿈에 대해 함께 생각하려고 합니다. 느부갓네살의 두 가지 꿈은 실은 다니엘서 전체를 요약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다니엘서는 두 꿈에서 나타난 두 상징으로 요약하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상징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뜨인 돌’이라면 두 번째 상징은 고난의 시대를 믿음과 인내로 살아가는 교회와 성도들을 상징하는 ‘그루터기’입니다. 다니엘서 4장은 느부갓네살이 자신이 꾼 꿈을 서술하는 장면(15절), 다니엘이 그가 꿈을 다시 서술하는 장면(23절), 그리고 다니엘이 그 꿈을 해석하는 장면(26절)에서 세 번 ‘그루터기’의 이미지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해하실 것은 다니엘서에서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의 민족의 경계를 허무셨습니다. 당시 상황은 북이스라엘에 이어서 남유다까지 이미 멸망당했습니다. 앗수르에 이어서 바벨론이 제국으로 등장했고, 큰 신상의 꿈에서도 이미 하나님이 계시하셨던 것처럼 바벨론에 이어서 메다왕국과 페르시아왕국, 그리스와 로마의 왕국까지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이후에도 인류의 역사는 사람과 사람의 조직으로서의 국가가 하나님이 주신 이 세상의 모든 영광과 이익을 독점하는 방식으로 기록됩니다. 역사를 승자의 기억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과 나라를 짓밟고 자신의 영광과 이익을 추구했던 제국의 왕들은 오늘날까지 역사에 그 이름을 길이 남기고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다니엘서 4장에서 느부갓네살이 꾼 두 번째 꿈에서는 큰 나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나무의 영광은 다니엘의 해석에 의하면 이미 이스라엘을 상징하지 않습니다. 꽃의 영광과 열매의 이익과 크고 높은 위용을 자랑하는 그 나무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일 수 있고, 다니엘서가 기록되었던 BC 6세기 당시에는 바벨론과 느부갓네살이며, 예수님의 시대에는 로마일 수 있고, 오늘날은 돈과 권력과 명예를 현재 역사적 상황 속에서 독점하고 사용하는 사람 혹은 집단을 상징합니다. 그루터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포로기에 고통당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꿈에서 등장하는 그루터기를 자신들이라고 해석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포로로 잡혀갔다고 해서 모두가 그루터기인 것은 아닙니다. 누가 하나님이 지키고 보호하기를 원하시는 그루터기가 될까요? 나라가 무너지고 성전이 훼파되며 나라의 백성들이 죽거나 도망치거나 포로로 잡혀가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향한 소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그루터기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남기셔서 작은 돌이 태산처럼 되고 세상을 가득 채울 때 그 그루터기에서는 새싹이 돋고 가지가 뻗어나며 잎사귀가 맺히고 꽃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따라서 느부갓네살의 두 번째 꿈에서 등장하는 그루터기 또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경계를 넘어서며 포로기의 시대적 경계 또한 넘어서고 있습니다. 2. 뿌리를 잃은 이스라엘 제가 요즘 저희 아이들과 이런저런 담소를 나눌 때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납니다. 저희 아버지는 대단히 말씀이 많은 분은 아니셨는데 가끔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기억나는 것 중 하나가 일제시대 학교를 다녔던 이야기입니다. 아주 엄격했던 일본 선생님 이야기, 당신의 이름이 ‘쿠니모토 세이따이’였다는 이야기, 학교에서 일본어가 아닌 한국어를 쓰다가 벌을 썼던 이야기... 뭐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린 마음에 당연히 질문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왜 일본은 그랬을까? 왜 한국어를 못쓰게 하고, 이름도 못쓰게 하고.... 일본어로 말하고 이름부르게 하려 했을까? 그들이 원했던 것은 뿌리를 바꿔내는 것이었습니다. 피어나는 꽃과 맺히는 열매를 바꾸려면 뿌리를 바꿔야 합니다. 바벨론은 포로로 잡아온 수많은 민족들, 그 중에서도 특히 자의식이 강하고 선민의식으로 뭉쳐졌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뿌리를 바꾸고자 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우리는 대표적으로 다니엘서에서 네 청년, 다니엘과 세 친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을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벨드사살’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다니엘이라는 이름의 뜻을 일부 사용한 바벨론식 이름입니다. 그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Shadrach, Meshach, and Abednego) 또한 바벨론식 이름입니다. 원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의 원래의 뜻과 바벨론식 이름의 뜻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의 이름을 지을 때 우리의 믿음과 소원을 따라서 짓습니다. 유대인들을 특히 더 그랬습니다. 그래서 다니엘과 세 친구는 모두 신탁하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이름에 ‘엘’이 붙으면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야’ 혹은 ‘냐’가 붙으면 ‘여호와’라고 보시면 됩니다. 다니엘과 하나냐와 이사엘과 아사랴는 모두 하나님 혹은 여호와와 관련한 이름을 가졌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들의 민족적 자의식과 신앙고백을 함께 담았고, 부모의 소원도 담은 좋은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와서 그들은 다른 이름으로 불립니다. 그들의 뿌리를 잘라서 그루터기로 성장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세상의 제국의 의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열매가 될까? 뿌리가 될까? 그런데 하나님이 거듭 제국의 정점에 있는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꿈에서 그의 나라의 모든 영광과 권력을 무너뜨리는, 세상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은 나라와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않는 권세에 대해 보여주신 하나님은 두 번째 꿈에서 부수고 무너뜨리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남겨두시는 사람들에 대해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루터기’리고 부르십니다. 아무리 그들의 이름을 빼앗고 소망을 빼앗고 노래를 빼앗고 싹을 자르고 또 잘라고 결코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다니엘서’하면 잘 아는 사건들을 보십시오. 소년 다니엘이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절합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채소와 마른 것만 먹고도 더 건강하고 더 지혜로운 학자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두라 평지에 세워진 왕의 신상에 절을 하지 않기로 결단합니다. 역시 목숨을 거는 일입니다. 평소보다 7배나 뜨겁다는 풀무불에 던져집니다. 얼마나 뜨거웠던지 그들을 던진 사람도 불에 타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함께 춤을 추고 있습니다. 다른 신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말라는 왕의 명령에 목숨을 걸고 기도하는 다니엘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열린 창, 그곳에서 그는 소망을 잃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목숨을 버리게 됩니다. 굶주린 사자의 굴에 던져졌습니다. 다니엘서를 설명하는 이 사건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꽃입니까? 그루터기입니까? 그들은 열매입니까? 뿌리입니까? 네, 다니엘서에서 우리들을 만나는 신앙의 선조들로서의 네 소년은 고난의 시대,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영광과 이익이 아닌 뿌리와 그루터기로 살아가는지를 보여줍니다. 고통과 고난이 있습니다. 가지가 부러지고 꽃은 꺾이고 열매는 탈취당할 것입니다. 나의 믿음으로 사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뜻으로 사는 일에 명예와 이익을 빼앗겨야 합니다. 그것이 고난의 시대, 그루터기로 살아가는 삶의 댓가입니다. 다니엘서는 폭력과 포로의 시대에 믿음을 지키는 그루터기의 삶을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4. 그루터기가 되기를 원하는 신앙 성도 여러분! 우리의 소원과 지향은 꽃과 열매를 향하는 것일까요? 그루터기와 뿌리를 향하는 것일까요? 다니엘서는 시험과 유혹이 능력을 발휘하는 시대, 고난과 핍박이 일상화된 시대에 성도와 교회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는 어떤 소원을 가지고 어떤 지향 속에 살고 있는가? 믿음을 지키고 스스로 뿌리가 되고 그루터기가 되어 새로운 세대를 위해 헌신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꽃이 되고 열매가 되어 영광과 만족을 얻는 삶을 지향할 것인가? 같은 질문이 예수님의 시대에도 던져졌습니다. 제자들은 고민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꽃과 열매를 향한 갈급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부정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뿌리와 그루터기를 말씀하실 때 그들은 왜 우리는 꽃과 열매가 될 수 없느냐고 항의했습니다. 더 낮은 곳에 더 깊이 죄와 악의 골짜기로 십자가의 뿌리를 내리는 예수님을 가로막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세상의 깊고 낮은 곳에 그들의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그루터기가 되는 삶을 선택하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고, 참으로 예수님의 오랜 인내와 변하지 않는 사랑이 필요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잘 압니다. 우리 이민 1세대가 얼마나 많은 헌신과 수고를 했는지 압니다. 아름답고 고결합니다. 신앙에서, 가정에서, 이민 사회 전체를 봐도, 그리고 한국 사회를 봐도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세대는 헌신하고 수고하여 뿌리가 되고 그루터기가 된 세대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의 가정과 삶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과의 관계에서도, 우리의 신앙과 삶의 지향에서도 그러한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루터기로 살아온 이유는 어쩔 수 없으니까.... 이민자니까.... 그런 세대였으니까.... 내가 그렇게 살아야 내 자녀가 꽃과 열매를 즐기니까... 이렇게 사는 것은 삶은 땅속에 박힌 뿌리이고, 현실은 땅에 들어붙은 그루터기인데.... 내 삶의 소원과 지향은 끊임없이 하늘로 향하고 꽃이 되고자 하고 열매를 즐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과 마음의 소원이 분리되고 우리의 신앙과 삶의 지향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온, 수고하고 헌신한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돌아보고, 내 마음과 삶에서, 우리의 관계와 교회에서 예수님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돌아보며.... 나도 예수님의 자리에서 함께 뿌리가 되고 그루터기가 되어... 섬기고 헌신하는 삶에서 기쁨을 누리며, 그루터기의 삶에서 감사를 드리는 교회와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제국의 왕 느부갓네살은 그 삶의 소원과 지향 때문에 결국 그루터기가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오늘 매일 믿음으로 사는 우리는 이 시험과 유혹의 시대에 믿음의 그루터기로 사는 영광과 은혜를 얻었습니다. 그루터기의 신앙에서 승리하는 초대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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