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예배 | 김나래 | 2024-03-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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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3. 24.
* 본 문 : 마가복음 14장 1-9절 말씀 * 제 목 : 그녀의 예배
지난 한 달 동안 저는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필요한 모든 일들을 순적하게 잘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 걱정하셨던 병원 진료도 소위 ‘의료대란’으로 불리는 중에 차근차근 해결할 수 있었고, 교단의 필요한 공적인 일들도 기대보다 더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염려와 기도에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이번 방문에서 가장 많이 만난 사람들은 목회자들입니다. 제가 2주 전에 쓴 목회 칼럼에서 한번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만났던 신학대학원 동기 목사님들은 대부분 형님들이시고, 60대 중반의 나이들이 되었습니다. 대화의 주제, 관심의 영역들이 거의 비슷했습니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첫째 자녀들의 결혼, 둘째 부모님들의 노환 혹은 별세, 셋째 자신들의 건강과 노후대책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만나는 대부분의 형님들이 같은 주제로 계속 이야기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 분,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전에 제가 몇 번 소개를 한 적이 있는, 오계강 목사님의 동서가 되는 목사님이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탄광에 가기도 했고, 김진홍 목사의 두레마을에 들어가기도 했고, 시골로 귀농을 했다가 농촌 목회를 하기도 했던 분입니다. 사업을 했던 적도 있고, 택시 운전을 한 적도 있습니다. 나이가 저보다 6살 많은 형님이신데,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이런 선택들이 불안정하게 보이기보다는 순수하게 보여서 좋습니다. 그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응도야, 요즘 보니까 말이야, 목사들이 하나님을 잘 안믿는 것 같애. 교회가 클수록 더 그래....”
원래 좀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분이라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분이 계속 말했습니다.
“나는 요즘 목회가 너무 감사하고 재미있어. 우리 교회... 교인이 딱 둘이거든. 우리 와이프하고, 집사 한 사람 있어.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서너 시간 씩 그냥 지나가.... 지난 주간에 묵상했던 말씀 나누고, 하나님과 소통했던 경험 나누고, 만났던 사람들을 위해서 같이 기도하고.... 우리는 늘 시간이 모자라. 그런데 요즘 목사들을 만나면 늘 정치 이야기 아니면 돈 이야기만 해. 믿음이 없나봐....”
처음에는 예의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나도 믿음이 없는 목사인가.... 반성하면서 점점 빨려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오기 바로 전날, 또 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수요예배에 청주에 있는 한 교회에서 말씀을 전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신** 목사님이라고... 한 때 우리가 부교역자로 모시려고 했던 분입니다. 청주에서 부친이 목회하시던 교회로 부임해서 섬기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과 3-4시간 함께 보냈던 짧은 시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시간에 신목사님이 제게 100개가 넘는 질문을 했을 겁니다. 교회에 대해, 목회에 대해, 사람에 대해.... 질문에 질문을 거듭했습니다. 어쩌면 그런 질문은 제가 그 나이 때 가졌을만한 질문이며,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았던 질문이며, 저에게도 잊혀졌거나 마음에 묻어둔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질문과 저의 대답을 다 기억할 수 없지만.... 이것만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질문을 생산하지 않는 마음은 늙어버린 마음이구나.... 더 이상 궁금하지 않고, 애써 찾으려 하지 않는 마음은 패배한 마음이구나.... 나는 이제 그런 마음인가....?
많은 목회자를 만났지만 딱 두 사람과의 만남을 마음에 담고 돌아왔습니다. 교회도, 목회도 세상 속에 있다 보니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 나의 마음밭에 이미 뿌리내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합니다.
1. 십자가의 시간
마가복음 14장 1-2절에서는 예수님의 처한 상황과 시간을 특정하고 있습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막 14:1-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매만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계산은 다소 복잡합니다. 어떻게 하면 저 예수라는 청년을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책임이나 손해 없이 제거할 수 있을까? 만일 사람들이 많을 때 저 청년을 제거하면.... 저를 따르는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소요를 일으키겠지.... 그러면 안되겠고.... 어떻게 할까...? 밤에 몰래.... 그러면 저 사람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아야 할텐데.... 그들의 이런 복잡한 계략에 발을 담그는 사람이 누굴까요?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의 마음도 복잡합니다. 십자가의 시간.... 설마했던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자신의 스승을 향한 유대 군중들의 기대와 종교지도자들의 적대감은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유다의 고민은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할까....?에 이릅니다. 스승 예수를 십자가의 자리까지 따를까? 아니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아니면... 그동안 따랐던 세월도 있고 하니.... 기왕이면 이익을 만들어볼까...? 유다만 그럴까요? 다른 제자들은 눈치가 없고 생각이 없을까요? 꼭 12제자가 아니어도 지금 베다니 시몬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눈 앞에 다가온 십자가의 시간에 정말 복잡하고 색깔이 다른 많은 계산들을 하고 있습니다.
2. 베다니 / 문둥병자 / 바리새인 / 시몬의 집에서
자, 여기 장소가 어리다고 했습니까? 동네는 베다니입니다.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입니다. 그런데 그는 문둥병에 걸린 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 다 나았다고 해도 몸에 그 흔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원래 자신은 나면서부터 바리새인이었고, 기득권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병에 걸리면 자신 혹은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문둥병이라는 전염병이 자신에게 다가왔습니다. 아마도 절망했을 것이고 원망했을 겁니다. 격리되고 외면당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가 그를 만나줬습니다.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는 그를 더럽거나 죄인으로 여기지 않고 긍휼과 사랑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집을 개방하여 예수와 함께 사람들을 초대하고 잔치를 베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는 뭔가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낍니다. 베다니는 또 누가 사는 마을입니까? 그 마을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마다 꼭 방문하는 마을입니다. 그곳에는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와 마리아와 마르다 세 남매가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자신의 문둥병을 고쳤습니다. 당연히 놀라운 일들의 증인들이 가득해야 하고, 예수님의 방문과 만남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지만....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평소에 예수에 대해 적대적이던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집안에 함께 들어와 있습니다. 분위기가 영 엉망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을 날이 가까웠다는 말씀을 계속하고 있고, 제자들은 무엇인가 분주하고, 번뜩이는 눈으로 예수님의 약점을 찾는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있고.... 단순히 웃고 즐기고 축복하는 자리가 아니라 적대적인 의도가 교차되고 있는 날선 자리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3. 한 사람, 예배의 마음
그 때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자신의 손에 들린 향유의 옥합을 열고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옥합을 깨뜨렸다’는 말을 항아리를 깨는 장면으로 생각하셨다면 오해입니다. 비싼 나드향유를 담은 옥합은 아마도 봉인되었을 것이고 그 봉인을 뜯고 기름을 부었다는 말입니다. 이 사건은 사복음서에 다 나오는데, 마 26:6-13, 막 14:3-9, 눅 7:36-50, 요12;1-8에 나옵니다. 상황과 시간에 조금 차이는 있지만 네 복음서 모두를 참조해서 이 말씀을 이해한다면.... 원래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밀려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입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그곳에서도 멸시를 당하는 직업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의 기록에 보면 예수님에게 고침을 받고 감사하여 자신의 집에 초대한 바리새인은 마리아가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발을 자신의 머리털로 씻기는 것을 불편해 합니다. “만일 저 사람이 정말 메시아라면.... 저 여인이 얼마나 더러운 여인인지 알텐데....”라고 정죄합니다. 자신은 긍휼의 대상이 되어 고침을 받았으면서 다른 사람을 같은 시선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제자들의 마음도 복잡합니다. 지금 그들은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지금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일 수 있습니다. 도피 자금을 마련할까....? 그래서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다른 제자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300데나리온에 팔 수 있는 것을 왜 허비해버리느냐고 책망합니다. 함께 자리에 앉은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도 이 마을에서 천대받던 여인이 이 중요한 자리에서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의 머리 속에는 복잡한 계산들이 다양한 수식으로 계속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리아를 책망하는 사람들을 잠잠하게 하십니다. 그녀의 행위를 ‘예배’로 해석하셨습니다. 6-9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막 14:6-9)
4. 제물이 되다.
우리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제단으로, 예수님을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스스로 속죄의 제물이 되신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현장은 하나님을 가장 영광스럽게 하는 예배의 현장이 됩니다. 이때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드린 향유는 마치 찬양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마을에서, 불치의 병 고침을 받은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십자가의 속죄제물의 예배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참 외롭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복잡하고 제자들은 두려워 떨고 있고 어떤 제자는 자신을 팔아넘기고 있습니다. 인생 가운데 가장 가치있고 보람되며 의미있는 시간은 창조주이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통하는 시간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상실한 인류에게 다시 하나님과의 교통함을 회복시키려고 십자가의 제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구원과 회복의 대상이 되는 청중들, 예수님과 함께 그 일을 감당해야 할 제자들.... 심지어 병고침을 받은 시몬까지.... 마음이 복잡합니다. 상황에 마음이 끌려갑니다. 분주한 세상의 질서가 그들의 시선을 빼앗습니다. 세상 권력이 두렵고, 세상 자랑이 부럽습니다. 모두가 각자 마음의 가치와 질서를 따라 분주하고 복잡한 계산을 하며....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로 그 때 단 한 사람, 예수님과 같은 마음... 예배의 마음을 품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칭찬하시는 것은 바로 그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과부의 두 렙돈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던 제자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나를 따르라, 내가 사람을 낚는 어부를 만들겠다’고 할 때 두 말없이 배와 그물과 가족을 버려두고 따르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거듭 고백하는 제자들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제물의 절반을 이웃과 나누고,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로 갚겠다는 세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의 대속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실 때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안위와 이익 혹은 손해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예수님의 죽음을 제사의 행위로, 예배의 헌신으로 받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아마도 한 근이나 되는 나드향을 모으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것을 한꺼번에 소비하는 일은 더 쉽지 않은 일인데.... 자신이 가진 전부를 주님의 헌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헌신하여 하나님을 예배한 것처럼 그 여인은 자신의 전부를 헌신하여 주님과 함께 예배의 ..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기념하여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의 마음, 우리가 고난의 주간과 부활의 예배를 준비하면서 회복해야 할 우리의 핵심가치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이 마음을 빼앗아 가려고 분쟁하게 하고 자랑하게 하고 부러워하게 하고 분주하게 합니다. 때로 성공하게 하고 실패하게 하며 걱정과 근심하게 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큰 기쁨과 자랑 때문에 예배의 마음을 망각하기도 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만났던 목사님들도, 그들 중에 한 사람이었던 저도.... 그리고 2024년의 고난의 주간을 맞이하며 부활의 예배를 준비하는 우리 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도.... 기억합시다. 회복합니다.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많은, 큰 일을 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일보다... 그 어떤 자랑보다 예배의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지킬 때 우리의 모든 헌신이 가치있는 것이며, 그 마음으로 드리는 두렙돈이든.... 300데나리온의 향유이든, 자신의 제물의 절반을 바치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귀한 성도로 살아가는 초대교회와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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