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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고 사모하고 힘쓰라! 김나래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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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국에 가서 발견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미국으로 유학을 오던 1998년만 해도 한국땅의 모든 끝.... 모든 해안선에는 초소가 있었습니다.  해운대, 태종대, 아내의 교향인 삼천포나 남해의 모든 해안선을 지키는 것은 군인들의 초소였습니다.  그런데 26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해안선을 지키는 것은 군인들의 초소가 아닙니다.  바로 카페입니다.  초소가 있떤 곳곳을 연결하여 산책로를 만들고 가장 몫이 좋은 곳에는 카페가 들어서 있더군요.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국토의 곳곳에 초소가 있었다는 것은 여전히 전쟁의 여운이 남았다는 것이고, 국민들이 국토를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었다는 것이니까요... 이제라도 국민들이 국토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카페마다 이름을 기가 막히게 지었습니다.  ‘폭풍의 언덕’이니 ‘통나무집’이니... 이런 것은 뭐... 옛날 이름들이구요, 요즘은 뜻도 알 수 없는 외국 이름을 많이 지었더군요.  그 중에서 제가 눈에 띄는 이름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해운대 달맞이 고개 입구에 딱 버티고 있는 카페였습니다.  'Serendipity'  사실 이 단어는 쉬운 개념의 단어가 아닙니다.  이 단어는 18세기 영국 작가 호레이스 월폴(Horace Walpole)이 만든 단어입니다.   렌딥의 세 왕자’(he Three Princes of Serendip)라는 페르시아의 우화가 있습니다.  이 세 왕자는 사람들이 우연이나 사고로 생각하는 일상의 일들 속에서 특별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할 줄 아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호레이스 월폴은 그들이 가진 통찰력에서 영감을 받아 ‘serendipity’라는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영적 민감성 혹은 독특한 지적 통찰력으로 해석이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이 단어는 주로 시인의 시선이나 마음을 나타낼 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나태주’라는 꽤 인기 있는 시인의 시 하나를 소개해보겠습니다.  제목은 ‘기도’입니다.    

 

내가 외로운 사람이라면 /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추운 사람이라면 / 나보다 더 추운 사람을 /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가난한 사람이라면 /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더욱이나 내가 비천한 사람이라면 / 나보다 더 비천한 사람을 /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때때로 / 스스로 묻고 / 스스로 대답하게 하여 주옵소서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 /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 나는 지금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이 시에서 나태주 시인의 serendipity는 자신이 어렵거나 힘든 상황 속에 있을 때... 정말 힘들다, 어렵다.... 고 느끼는 것은 평범한 것입니다.  그는 시선을 돌려서 자기 주변에 자신보다 더 어렵고 불쌍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발견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그는 자신의 현실과 지향과 시선과 비전을 함께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고 삶으로 느끼는 감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에 넘어서는 삶의 진실을 느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시선의 시선이면서 그의 serendipity입니다.  

 

1. 베드로가 만난 부활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경험하는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여인들이 빈 무덤을 발견하고 사도들에게 달려왔을 때 가장 먼저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가 직접 무덤을 찾아가서 빈 무덤을 확인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예수님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습니다.  모든 가르침을 듣고 배우고 확인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마지막 날까지 그는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여러 제자들과 무리들과 함께 모여 있습니다.  아마도 불안하고 슬프고 무섭고... 그래서 모였을 겁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달려와서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고 천사들을 만난 일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는 즉시 달려가서 빈 무덤을 했습니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적절하고 당연할까요?  

 

만일 그가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이었다면.... spiritual serendipity 가진 사람이었다면 그는 이런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아하.... 하고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그렇지...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이 바로 이거지!!!!  적어도 이때 쯤에는 깨달았어야 합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자신이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예언하셨던 바로 그 부활의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무덤을 확인하기 전에 여인들이 달려오는 소리를 들을 때 벌써 알았어야 합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이 시신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외칠 때 알았어야 합니다.  그녀들이 천사들을 만났다고 말할 때 알았어야 합니다.  천사들이 왜 두려워하느냐고, 왜 산 자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느냐고 말했다는 것을 들었을 때라도 깨달았어야 합니다.  무덤으로 달려가는 중에 깨달았어야 합니다.  그래, 그래.... 그래....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를 죽음 가운데 패배하게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분이야....라고 뛸 듯이 기뻐하고 외쳐야 합니다.  그가 영적으로 민감하고 주변에 일어나는 아주 사소한 변화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아니.... 그정도로 민감한 사람이 아니어도.... 어쩌면 아무리 무딘 사람이라도 적어도 예수님의 수제자쯤 된다면,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과 가르침을 듣고 배웠다면.... 절망 가운데 예수님의 시신이 향품을 바르기 위해 무거운 발걸음으로 떠났던 여인들이 바쁘고 분주한 발걸음으로 숨 가쁘게 달려오는 모습만 보고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베드로는 아직 부활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2. 부활을 말씀하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부활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수없이 많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주셨던 수많은 암시들과 말씀들에서 그는 부활을 이미 배우고 믿음 안에서 경험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적어도 세 번 예수님이 스스로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신앙을 고백하고 그의 신앙의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며 천국의 열쇠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렇게 예언하십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 16:21)  그런데 베드로도, 제자들도 이 말이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마 17:22-23)  제자들은 무엇에 대해 근심했을까요?  예수님이 아닌 자신들의 안위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아십니다.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마 20:18-19)  

 

그런데 그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다가와서 요청합니다.  예수님이 보좌에 앉으실 때 한 아들은 좌편에, 다른 아들은 우편에 앉혀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제자들이 분노하고 다툽니다.  이것이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실은 예수님의 고난을 두려워했고, 부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두려움이 그들을 지배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 앞에 부활의 신앙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팔고 잠자고 부인하고 도망쳤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라고 말씀하셨는데 말입니다.  그것뿐입니까?  그들의 마음에 ‘부활’이라는 단어가 심기지 않았기 때문에 천사가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6)라고 해도 빈 무덤은 보이는데 그 마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부활의 여러 증거들 앞에서 민감하게 반응할 수 없었습니다.

 

3. 부활이 각인되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찾아오셨고, 그를 추적하셨습니다.  그가 믿지 못할 때 그에게 직접 찾아오셔서 부활을 경험하게 하셨고, 그가 낙향했을 때 그를 위해 고기와 떡을 구워주시며 사랑과 사명을 확인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갈릴리로 낙향했을 때는 이미 예수님을 여러 번 만난 후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삶으로 경험하고 난 다음에도 그는 부활의 신앙으로 준비되지는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과 믿는 것과 살아가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정의로운 삶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과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인정하는 것은 다릅니다.  정의가 옳은 줄 알지만.... 세상이 어디 그렇게 되겠나...라고 생각한다면 정의의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의의 당위성을 인정은 하지만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또 다른 차원입니다.  옳은 줄 알지만.... 손해를 볼 수는 없잖아....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때문에 정의를 알고 인정하고 옳다고 믿는다는 것과 매순간 정의롭게 산다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부활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부활을 경험하고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과 부활의 신앙으로 사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습니다.  그가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가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 오랜 훈련, 오랜 자기부정과 변화의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부활의 믿음이 자신의 마음과 삶에 각인되고 흔들리지 않는 삶의 지향으로 나타나게 되는 일은 베드로가 제자가 되고, 자기 부인을 경험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만나고, 성령의 임재와 도우심을 경험하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설교하고, 그러나 또 넘어지고 쓰러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이루어집니다.  자신을 위해 죽었다가 살아나셨고, 승천하셔서 자신을 기다리고 계신 주님을 만날 날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자신 또한 알고 있습니다.  이제 자신도 주님을 따라 순교의 제물로 드려질 것입니다.  베드로후서는 그가 네로에 의해 AD. 68년 경에 순교를 당하기 1-2년 전에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제 주님 만날 날이 가까웠고, 그는 더 이상 연약하고 흔들리는 믿음으로 살 겨를이 없습니다.  그가 오늘의 말씀으로 자신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4. 바라보고 사모하고 힘쓰라!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1-14) 

 

그는 이 말씀에서 ‘바라보라’는 권면을 세 번 반복합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자’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라’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하나님의 심판의 날, 부활의 신앙으로 준비된 성도와 교회에게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을 함께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간절히 사모하라’고 권면합니다.  흔들리는 세상과 분주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을 향한 삶의 지향을 잊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풀어지고 녹아지고 사라질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것처럼 보이고 유혹과 시험의 대상이 되고 우리를 두렵게 하고 염려하게 했던 모든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십자가의 영광만 남을 것입니다.  그 날을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해야 합니다.  사모하는 마음... 기다리는 마음이 우리의 영적 민감성을 유지하게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삶의 곳곳에 순간마다 허락하시는 메시지를 읽고 음성을 듣게 합니다. 

 

그것만으로 부족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라고 물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는 사람,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 그리고 부활하시고 우리를 위해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나기에 점도 없이,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만날 수 있는 성도요 교회로 살아가기에 ‘힘쓰라!’.... 최선을 노력을 다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서 권면하고 있습니까?  늘 패배하는 믿음으로 살았던 베드로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가르치고 경고하고 부탁하고 권면해도 알아먹지 못하고 도망치고 배반했던 베드로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와 너무 다른... 듣고 배우면 믿고 그대로 살아가는 어떤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처럼 연약하고 우리처럼 늘 패배하고 우리처럼 이기적이었던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그가 주님 만나는 날이 가까워지고 자신의 삶의 전과정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도우셨던 부활의 주님을 다시 만나기 위해.... 나는 어떻게 하고 교회와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할까?  분주하고 강력한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하면 세상에 마음과 생각이 흔들리지 않고 주시는 말씀과 인도하심에 민감한 삶을 살아갈까.... 하나님은 베드로의 신앙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를 권면하십니다.  바라보고, 사모하고, 힘쓰라.... 우리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바라보고 사모하고 힘쓰라..

부활의 주일에 함께 예배하며 새 하늘과 새 땅, 죽임당하셨고, 부활하셨고, 우리에게 다시 오실 주님과의 만남의 날을 바라보고, 사모하고 힘써 준비하는 초대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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