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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2024 주일예배 김나래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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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4. 21.

 

* 본 문 : 다니엘 6장 19-22절

* 제 목 : 너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29. 성도여 다 함께 [(구)29장] / 312.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구)341장]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서론에서 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고민을 했습니다.  같은 노회에 한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님이 저의 설교를 듣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하고.... 살짝만 이야기를 해 볼랍니다.

 

얼마 전에 노회를 할 때였습니다.  한 목사님이 개회 설교를 하셨습니다.  설교의 제목이 ‘마음을 넓히라’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 용납하고 이해하지는 말씀이었습니다.  노회를 할 때, 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 성도들을 만날 때 우리가 먼저 마음을 넓혀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서로를 바라보면 서로에 대해서 넓은 마음을 품을 수 있을 것인데... 참 안타깝다.... 뭐 이런 말씀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저는 그 목사님과 눈을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노회에서 제일 양보 안하고 손해 안보고 다른 목사 의견 안듣는 목사님이 바로 그 분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님과 관련된 일에 의논할 일이 있으면 거의 에너지가 다 소실되고 맙니다.  정말 개인적으로나 목회적으로 손해를 안보시는 분이고, 또 잘 삐지기도 하시는 편이라.... 참 힘든 분이시거든요.  그런데, 마음을 넓히라고 설교를 하시니.... 고개를 들 수도, 눈을 마주칠 수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그날 설교는 분명 하나님의 말씀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통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그 예배의 청중들에게 주시는 말씀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영광 앞에 유일하게 그늘진 것처럼 보이는 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목사님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을 만날 때마디.... 제발 쫌.... 뭐 이런 생각을 했었으니까요....

 

하지만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목회자이고 설교하는 사람입니다. 나도... 혹시....?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는 하는데, 그 말씀이 나를 통해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는 하되... 정작 내 삶에는 뿌리를 내리지 않은 것은 아닐까?  내 삶에 심기지 않았기 때문에 옳은 말에 능력이 없고, 내 마음에 심기지 않았기 때문에 너의 복음이기는 하되 나의 복음은 아닌 말씀을 전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날 설교에 하나님은 제게 독특한 방식으로 은혜를 주셨습니다.

 

1. 손 씻는 빌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말씀을 나눌 때 제가 베드로와 함께 자주 소개하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빌라도입니다.  제가 청년 전도사였을 때, 한참 빌라도에 대해 고민할 때 그에 대한 노래도 만들었습니다.  제목이 ‘대답하라, 빌라도!’였습니다.  제가 그 노래에서 빌라도 묻고 싶었던 것은 그가 손을 씻는 행위였습니다.  그는 한 시대를 살았던 지식이자 최고의 관료이면서 다른 사람의 죄 혹은 무죄에 대해 판단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법정에 끌려온 예수의 무죄를 확신합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를 당시 최고의 형벌이었던 십자가 형으로 판결합니다.  그리고는 손을 씻습니다.  책임을 회피하는 행위입니다.  마태는 이렇게 전합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마 27:23-26)

 

그가 손을 씻는다고 해서 그의 죄가 사라질까요?  그가 책임을 군중들에게 돌린다고 해서 그 책임이 면해지는 것일까요?  그는 자신의 책임을 군중들에게 전가하고 양심의 가책을 피하고자 했지만 역사와 성경은 그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의 무죄와 군중들의 무지와 제사장들의 악함을 알면서도 자신의 양심과 지식에 반하는 결정을 했습니다.  자신의 현재의 삶이 재판관이요 총독으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감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과 함께 따라오는 아주 작은 손해와 위험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나약함과 비겁함이 그 이유가 되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사회에는 몇 년 전에 크게 이슈가 되었던 한 사건이 있습니다.  가습기에 특정회사가 홍보했던 살균제를 사용한 사람들의 폐에서 섬유화 증세가 일어나, 2021년 1월 12일까지 신고된 사망자만 1,740명, 부상자 5,902명에 달하는 피해자가 나온 재해가 있었습니다.  국가기구인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는 신고되지 않은 사례를 포함하여 1994년부터 2011년 사이에 사망자 20,366명, 건강피해자 950,000명, 노출자 8,940,000명이 발생한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정말 엄청난 사회적 재난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사건이 제대로 평가, 판단을 받지 않고 잊혀지고 있을까요?  소위 전문가들 때문입니다.  

 

살균제 회사가 엄청난 규모의 재정을 사용해서 각 대학과 연구소를 섭외, 매수했습니다.  그들은 피해자가 일정한 숫자로 나타나기까지 살균제의 피해가 없거나 과장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보다 컸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피해가 사회적으로 나타나기까지 그들의 의견이 언론을 지배했습니다.  피해자들은 오히려 대기업에 돈을 뜯어내려고 하는 파렴치한 사람들로 손가락질 당하기도 했습니다.  현존하는 피해에 대해 전문가로서의 정확한 소견과 판단을 피력해야 할 사람들이 이익과 손해, 자기 논리를 앞세워서 책임을 외면하고 은폐했던 슬프과 안타깝고 분노스러운 사건입니다.  여전히 피해의 규모와 상황이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고 보상도 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는 오늘날 한국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 곳곳에서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양심과 믿음을 따라 판단과 책임이 이뤄져야 합니다.  이익과 손해의 관점으로 내가 가진 책임을 외면할 때 사회적 정의와 역사적 정당성의 가치는 무너지고 맙니다. 

 

2. 다리오의 ‘너의 하나님’

 

저는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만나는 메대의 왕 다리오에게서 빌라도의 향기를, 한국의 책임성 없는 지식인의 향기를 맡습니다.  어쩌면 향기... 라기보다는 더러운 냄새입니다.  그는 지난 주에 설명을 드린 대로 역사적으로 비운의 왕일 수 있습니다.  미디아와 페르시아와 바벨론의 통합 제국의 왕이 되었지만 실권은 조카인 ‘고레스’가 쥐고 있습니다.  그는 더 많은 존경과 권위를 얻고 싶었고, 신하들의 지지가 필요했고... 그리고, 어리석었습니다.  신하들이 다니엘 앞에 사자의 굴을 파고 던져 넣으려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총애하는 신하를 죽이기 위해서 자신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는 도장을 찍어줍니다.  드디어 이 신하들의 계략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다니엘을 사자의 굴에 던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다리오 왕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연약하고 어리석은 왕이어서... 간교한 신하들의 계략에 넘어갔습니다.  내가 가진 권력에 의해서 내가 사랑하는 다니엘이 나를 이용하는 악한 신하들에 의해 사자의 굴에 던져질 것입니다.  허락하자니 다니엘을 잃게 될 것이고, 가로 막자니 왕의 권위가 손상될 것입니다.  다니엘을 구하자니 신하들의 충성을 잃게 되고, 신하들의 충성을 얻자니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야 합니다.  바로 이 순간, 그는 이렇게 결정합니다.   

 

“이에 왕이 명령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단 6:16)

 

그는 20절에서 한 번 더 확인합니다.  

 

“다니엘이 든 굴에 가까이 이르러서 슬피 소리 질러 다니엘에게 묻되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하니라”(단 6:20)

 

그가 다음 왕인 고레스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용될 수 없는 이유를 자신의 입으로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니엘의 하나님’을 알되 그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의 하나님의 그의 삶에 역사하실 것이나.... 나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빌라도가 그랬습니다.  정의를 알되 자신의 삶에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무죄를 알되 판결로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정의와 믿음은 있으되 그들의 것일 뿐 나의 것은 아닙니다.

 

3. 다니엘의 ‘나의 하나님’

 

다니엘이 다리오왕에게 담대하게 말합니다.

 

“다니엘이 왕에게 아뢰되 왕이여 원하건대 왕은 만수무강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의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단 6:21-23)

 

지금 다니엘은 누구의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그는 ‘나의 하나님’으로 선언합니다.  성경이 다니엘이 사자의 굴에서 해를 입지 않은 사건을 해석하기를 23절 마지막에서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조상의 하나님이 아니요, 친구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이웃이나 그 누구 위대한 사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니엘이 사자의 굴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바벨론의 왕궁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제국이 멸망하과 왕조가 무너져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니엘서에서 사자굴에 대한 기사를 읽을 때 하나님이 다니엘을 구원하셨구나... 기도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지키시는구나.... 라고 받습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니엘 6장을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은 경계선을 그어보는 것입니다.  그 경계선은 ‘나의 하나님을 믿는 다니엘’과 ‘너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다리오 왕’ 사이에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다니엘 6장을 드라마로 만든다고 합시다.  우리는 드라마를 보면서 감정을 이입하게 되고 드라마의 그 누군가와 같은 입장에 서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 다니엘 6장의 드라마에서 누구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싶으십니까?  당연히 다니엘이지요.  그렇다면 이 드라마에서 빌런의 역할, 즉 드라마의 주제와 연결하여 악당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다니엘을 모함하는 신하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보면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리오 왕입니다.  다리오왕은 나 다니엘 편일까요?  빌런인 신하들의 편일까요?  

 

4. 경계선, 다니엘과 다리오왕 사이

 

제가 아까 경계선을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은 다리오왕을 다니엘의 편에 두고 경계선을 긋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신하들의 편에 두고, 다니엘의 반대편에 두고 긋고 싶으십니까?

 

적어도 다니엘을 직접 핍박하지는 않고... 또 하나님을 인정하네.... 마지막에 보니까 다니엘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함했던 신하들을 다 죽이기도 하네... 그러면 우리 편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명령했던 사람입니다.  다니엘을 사자의 굴로 던지는 명령은 그의 입과 손에서 나왔습니다. 왜요?  어떻게요?  그는 하나님을 알되 다니엘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의와 진리를 알되 나의 것은 아닙니다.  내 삶에 적용하고 붙들어야 할 것들은 아닙니다.  나는 이익을 선택할 것입니다.  나는 권력을 선택할 것입니다.  나는 나의 자존과 행복과 영광을 선택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믿음으로 사느라.... 손해는 보지 않겠습니다.  말씀으로 사느라.... 고난 당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정의로운 삶을 살기보다 안전한 삶을 살겠습니다.  나는 양심을 선택하기보다 좀... 이기적으로 살기로 했습니다.  나는 권력이 필요하고 인정이 필요하고 신하들의 지지가 필요하고 나를 칭찬해주고 인정해주고 섬겨주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 옳은 줄은 알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정의와 그들의 진리와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지켜주기를 바랍니다.  나는 내 이익을 붙잡겠습니다.....  이것이 다리오왕의 가치이자 삶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다리오왕은 경계선 어느 편에 서 있을까요?

 

저는 오늘 서론에서 좀 위험하지만... 오해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동료 목사님의 설교를 폄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만난 저를 고백했던 것으로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한 것처럼 내가 전하는 말씀에 나 자신이 가장 먼저 점검과 판단의 대상이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말씀의 여러분의 말씀이 아니라 내 말씀이 되고, 여러분에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라 내가 적용하고 실천해야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한 사람은 나의 하나님을 만나고 있지만 다른 한 사람은 너의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다리오가 다니엘의 하나님이 아닌 나의 하나님을 고백했다면 그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가장 지혜로운 선택을 했을 것입니다.  빌라도가 손을 씻는 선택이 아니라 양심과 지성을 지키는 선택을 했다면 그는 오늘 2000년이 지나서 우리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함께 나누는 이 말씀을 다른 어느 누구가 듣고 적용해야 할 말씀이 아니라 바로 내가, 우리가, 초대교회 공동체가 듣고 받고 믿고 따라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할 때....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되고, 우리가 세상과 교통하는 호흡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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