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2024 주일예배 | 김나래 | 2024-04-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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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 : 다니엘 10장 1절 말씀 * 제 목 :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
25. 면류관 벗어서 [(구)25장] / 454. 주와 같이 되기를 [(구)508장]
수목이 귀한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했던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사랑했던 나무와 꽃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자주 언급되는 백향목이 있을테고, 무화과 나무도 있고, 감람나무도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한 나무가 있습니다. ‘도금양’(myrthle)이라는 나무입니다. 개역 성경에는 ‘화석류’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제가 한국에 갔을 때 개업을 하는 한 가게 앞에 놓인 화환이 있었습니다. 그 화환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돈 세다가 잠들게 하소서!’(사진 1) 만일 그 화환을 보낸 사람이 유대인이라면 그런 소원 대신 도금양 나무 가지로 가게 문을 장식해줬을 것입니다. 도금양 나무는 가지와 잎이 무성했고, ‘풍요와 성공’을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이 나무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을 지킬 때 네 종류의 나무가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집을 장식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산으로 나가서 올리브 나무 가지, 소나무 가지, 도금양나무 가지, 야자나무 가지, 그 밖에 잎이 무성한 가지를 꺾어다가, 쓰여 있는 대로 초막을 만들어라"(느 8:15)
또 도금양 나무는 생명력이 강했습니다. 대부분 나무 가지들은 둥지에서 잘리면 그 순간부터 곧바로 시듭니다. 하지만 도금양은 잘린 가지가 잘 시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땅에 심으면 다시 살아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죽은 사람의 관에 도금양 나무 가지를 올려놓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 나무는 ‘생명력과 부활’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55장에서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55:1)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의 회복과 부흥을 약속하시면서 12-1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기쁨과 평안 가운데서 살게 될 것이며 산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들의 모든 나무들이 손뼉을 칠 것이며 가시나무가 있는 곳에 잣나무가 자라고 찔레 대신에 도금양이 자랄 것이다. 이것이 나 여호와가 행한 일을 상기시켜 주는 영원한 표적이 될 것이다.”(사 55:12-13) '
한편 유대의 신부들은 결혼을 할 때 화관을 썼습니다. 화관의 재료가 되는 것이 바로 도금양나무의 꽃(사진 2,3)이었습니다. 그들은 도금양 나무에서 수많은 잎이 나오고 예쁜 꽃이 열리는 것처럼 신부에게서 많은 자녀가 생산되기를 기원했습니다. 도금양 나무에 피어나는 희고 고운 꽃은 ‘하닷사’라고 불렸습니다. 성경에서 ‘하닷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1. 새 이름으로 불리다.
이스라엘의 포로기에 기록된 여러 성경이 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경과 성벽 건축을 하는 과정을 기록한 에스라와 느헤미야, 학개와 같은 성경이 있고, 포로 시대를 살면서 이방의 땅에서의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그린 다니엘과 에스더와 같은 성경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 에스더는 제국 바벨론이 멸망하고 메대 바사 왕국을 지나서 통일 페르시아 제국의 왕비로 살았던 한 여인의 삶에 대한 기록입니다. 오늘날 세계사에도 그 이름이 등장하는 페르시아 제국의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가 된 여인이 에스더였고, 그녀의 본명은 ‘하닷사’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출애굽의 기쁨을 만끽할 때 집을 장식하던 나무, 질긴 생명력으로 가지가 잘리고 뿌리가 뽑혀도 어디서나 땅에 꽂히기면 하면 다시 풍성한 생명으로 살아나는 나무, 유대의 신부들이 아름다운 가정과 자랑스러운 자녀를 꿈꾸며 그 머리에 화관으로 만들었던 나무... 그 나무에서 피어나는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이 ‘하닷사’입니다.
그녀의 부모는 포로로 잡혀온 이방의 땅에서 예쁜 딸을 낳았습니다. 이름을 ‘하닷사’라고 지었습니다. 그들은 고향의 땅에서 해방과 자유를 축하하며 집을 장식했던 도금양 나무와 어여쁜 신부들의 머리를 장식하던 꽃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딸의 시대에는 조국으로 돌아가 회복과 부흥의 때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온 민족이 함께 도금양의 화관을 쓰고 함께 제사하며 축제하는 꿈을 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닷사의 부모는 일찍 죽고 맙니다. 그녀는 ‘모르드개’라는 사촌 오빠의 손에 자라게 되었습니다. 이방의 왕의 신부가 되어 하닷사, 도금양 나무의 화관이 아닌 페르시아의 왕궁의 화관을 쓰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기도했고 자신이 꿈꿨던 인생은 하닷사의 인생이었는데, 그녀는 에스더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에스더는 바벨론 사람들이 섬기던 ‘이슈타르’(Ishtar)라는 여신의 이름에서 왔습니다. ‘별’이라는 뜻입니다. 그녀가 언제부터 에스더라는 이름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녀의 본명이 하닷사였다는 것과 그녀가 에스더로 불렸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녀는 포로기에 제국의 우상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새 이름으로 불렸던 수많은 유대인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2. 벨드사살이라는 이름
그리고, 다니엘 또한 그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세 친구도 그랬습니다. 세 친구의 이름의 뜻은 제가 이미 소개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뜻의 다니엘의 새이름은 ‘벨드사살’이었고, 그 뜻은 ‘벨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벨은 바벨론의 우상이었습니다.
다니엘서는 당연히 기록자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이 이 성경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들이 독특합니다. 일반적으로 그는 자신을 3인칭으로 부릅니다. “그들 중에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단 1:6) 그런데 사람들이 다니엘을 부를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부를까요? “왕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벨드사살아 너는 이 꿈과 그 해석으로 말미암아 번민할 것이 아니니라 벨드사살이 대답하여 이르되...”(단 4:9)라고 했습니다. 그는 포로로 잡혀갈 때는 다니엘로 불렸지만 바벨론의 왕궁으로 들어가서는 벨드사살로 불렸습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이 자신을 부르는 다른 사람의 말을 옮길 때는 어떻게 불렀을까요? “왕이 대답하여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에게....”(단 2:26)라고 했습니다. 다니엘 곳곳에서 이 표현이 등장합니다. 누가 이 성경을 기록했습니까? 다니엘입니다. 그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다니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의 땅에서 그는 벨드사살로 살아야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렇게 불릴 뿐.... 자신은 다니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왕은, 제국은, 세상은 그를 벨드사살로 불렀지만 그는 자신을 ‘그렇게 불리는.... 다니엘’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하심을 믿는 다니엘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3. 누구의 이름으로 살 것인가?
에스더의 보호자였던 ‘모르드게’의 이름은 ‘마르둑’이라는 신의 이름에서 왔습니다. 성경이 그의 본명을 소개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는 벤냐민 지파의 후손으로 분명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자신이 이방의 신의 이름에서 온 새로운 불렸지만 하나님의 뜻과 때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동생인 에스더 또한 같은 생각과 삶을 가지기를 원했습니다. 포로로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치명적인 위험이 다가왔을 때 그는 자신의 동생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4:14)
그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에 대하여 깊이 고민했고, 자신과 동생이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기를 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헌신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 민족의 회복과 부흥을 위하여 다른 방법을 사용하실 것이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살지 않았던 이유로 함께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 그는 비록 이방의 신 마르둑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때와 방법에 동참하고자 했고, 그의 동생을 설득합니다. 유다의 꽃에서 페르시아의 별이 된 에스더는 오빠의 이 말을 듣고 결단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는 결단은 바로 여기에서 왔습니다. 에스더가 말씀과 믿음에 순종하지 않을 때 이방의 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한 여인으로 살다가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하나님의 뜻과 때에 순종하기를 원했을 때 이방의 땅에서 에스더의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의 삶은 하닷사, 회복과 부흥의 꽃으로 피어날 수 있었습니다.
4. 나는....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이 스스로를 ‘벨드사살이라 이름하는 다니엘’이라고 표시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방 제국의 권력자들이 자신에게 붙인 이름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포로로 잡혀왔고, 똑똑했던 유대의 청년들을 바벨론의 제목으로 교육시키고자 했던 느부갓네살왕의 정책에 의해 벨드사살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며 그 이름 앞에 대답했어야 합니다. 그는 그 이름으로 느부갓네살왕에게 거듭 꿈으로 임했던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했고, 벨사살왕에게 벽의 글씨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해석했습니다. 그는 메대바라 왕국의 다리오 왕의 시대에도 여전히 같은 이름으로 불리면서 총리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제국이 섬겼던 우상의 이름으로 다니엘을 천번 만번 부른다고 해서 그가 그들의 뜻과 의도대로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다니엘이 자신을 ‘벨드사살이라 이름하는 다니엘’이라고 소개하는 것처럼 그들은 그의 이름을 우상의 이름으로 불렀지만 다니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며 자신의 이름을 다시 한번 되뇌이고 기록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벨드사살이라 부르는가? 나는 다니엘의 이름으로 대답하겠다고 확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나라와 백성 이스라엘은 그들 모두의 동일한 수준으로 신앙으로 하나님과 교통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늘 의미있는 소수의 무리를 보십니다. 아브라함의 시대에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 가운데 10명의 의인을 찾으셨던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시대에는 단 한 사람의 의인을 찾아서 예루살렘 거리를 두루 다녔습니다. 기드온의 시대에는 300명의 용사로 나라를 지켰으며, 엘리야의 시대에는 7000명의 의인을 남기셔서 복음의 계보를 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무너지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죽거나 포로로 잡혀갔던 시대에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조차 지킬 수 없었던 연약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가족을 잃고 나라를 잃고 고향을 잃은 사람들, 상실의 시대.... 절망을 숨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름마저 잃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이방 신의 이름으로 불려야 합니까? 언제까지 고향과 가족을 떠나 이방의 땅에서 그들의 신의 이름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까? 그들이 울며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다만 그들이 그 어두운 시대를 어떻게 사는지를 지켜보십니다.
그 어두운 시대에 모르드개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방의 신 마르둑의 이름으로 불렸지만 하나님의 시간과 자신의 사명을 고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에스더가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스다롯, 이슈타르의 이름으로 불렸지만 그녀는 민족을 위해 생명을 바쳤습니다. 이방의 별 에스더가 아닌 유대의 꽃 하닷사로 살았습니다. 그녀를 통해 어두운 포로의 시대에 회복과 부흥의 소망이 싹을 틔웠습니다. 어떻게 그들은 그런 신앙으로 살았을까요? 오늘 다니엘이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그들의 이름으로, 그들의 소원을 따라, 그들의 욕망으로 부르고 있지만.... 나는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나는 세상이 벨드사살이라고 부르는, 나는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사모하는 다니엘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 세상의 심판날을 계시하실 것이고 나는 그 날을 사모하며 기다립니다..... 다니엘은 오늘 본문에서 담대하게, 담담하게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다니엘과 에스더보다 훨씬 강력하고 간교하고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진리와 거짓이 구별되지 않고, 하나님과 세상이 구별하기 어려우며, 하나님의 뜻과 나의 욕망이 섞인 시대를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불리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소원으로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가는 나, 다니엘.... 우리, 초대교회.... 나, 하나님의 자녀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라고.... 그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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