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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23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김나래 2024-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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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6. 23.

 

* 본 문 : 요나서 1장 9-12절 말씀

* 제 목 :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지난 주 나눈 말씀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지난 주에 요나와 나훔의 관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약 100년의 시간적 간격을 두고 활동했습니다.  이방 나라와 도시에 대해서 예언했습니다.  요나는 북이스라엘 출신으로 이스라엘이 멸망당하기 전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외쳤고, 그들은 회개했습니다.  나훔은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하고 앗수르가 가장 강성하던 때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주변의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학살하며 수탈하는 모습 그대로 멸망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제가 강조해서 설명드린 것은 요나서 4장의 역할이었습니다.  3장까지는 회개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적용된다는 신약적인 가치가 구약의 마지막 시대에 이미 증거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4장에서 요나의 모습은 3장까지의 전개와는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인데.... 하나님은 요나에 대해 관대하십니다.  그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대해 항의하면서 니느웨의 멸망을 기다린다고 할 때 하나님은 그를 다독이기는 하지만 그의 그런 태도를 ‘불순종’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나훔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요나서 4장의 요나는 곧 나훔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할 때, 회개의 삶을 지속하지 못할 때....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누리고 부흥과 회복의 잔치를 누린 후에 그 삶을 계속하지 못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에 합당하고 복음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요나서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조금 전에 요약해드린 말씀은 요나가 던지는 메시지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요나서 4장을 말하기 위해서 1-3장이 있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요나서는 4장에서 나훔으로 이어지는 경고의 말씀 이전에 1,2,3장에서 이미 복음적 가치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요나서의 핵심 주제와 메시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 “나는 아니지요?” 

 

마가복음 14장 12-31절에는 베드로가 기억하는 최후의 만찬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와 함께 앉아서 만찬을 나누시면서 그들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앞을 다투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막 14:19)

이 장면에는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이 상황에서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화가 나지 않을까요?  선생님, 저를 모르십니까?  제가 선생님을 따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는데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정말 섭섭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제자들 중에 그 누구도 예수님께 화를 내거나 항의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들은 왜 자신들을 신뢰하지 않는 스승에게 분노하지 않았을까요?  왜 근심하기까지 했을까요?  

 

그 이유는 만찬 이후의 장면에서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만찬을 마치고 감람산으로 올라가십니다.  그곳은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산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자신이 곧 잡히게 되고, 모든 제자들이 흩어져 도망갈 것이라 말씀합니다.  바로 그때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갈지라도 나는 결코 아닙니다.”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30절에서 베드로에게 유명한 말씀을 주십니다.  그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은 결코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겁니다.  주님과 함께 죽겠다고 말합니다.  모든 제자들이 같은 말과 같은 맹세를 했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을 볼 때 결국 베드로와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의 날에 “나는 아니지요?”라는 말을 세 번 반복한 것과도 같습니다.  

 

왜 그들은 스승이 자신들을 믿지 않고 거듭 배반에 대한 예언을 할 때 분노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왜 수동적이고 방어적으로 회피하려고만 하는 것일까요?  결과가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도망갔지요.  결국 예수님을 부인했지요.  왜 그들이 분노하고 섭섭해하지 않았을까요?  실은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이미 패배와 배반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걸고 있는 베드로도, 베드로에 지지 않으려고 우리도 그렇다고 외치는 제자들도 모두 스스로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2. 십자가를 지는 이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그들의 배반을 책망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을 수치스럽게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담담히.... 그들이 결국 자신을 버리고 도망할 것을 말씀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들의 연약함을 인정하셨고, 이해하셨고,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들의 연약함과 비겁합과 배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나는 아니지요...라는 말은 내가 당신의 십자가의 이유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묻는 질문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아니아니.... 내가 십자가를 지는 이유는 바로 너!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는 이유는 이렇게 연약하고 거짓되며 어리석고 부족한 바로 너와 너와 너를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대제사장과 유대인의 무리들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악의를 품고 예수님을 로마 제국의 형틀인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그 사람들뿐입니까?  잘 생각하시면 어쩌면 대제사장들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더 큰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굴까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지도 믿지도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책임이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 아니면 구원을 받지 못할 사람들이 오직 예수로 말미암아 생명과 부활의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대해 책임이 있을까요?  저는 분명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은 아니라고 부인하는 제자들을 보십시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나는 아니지요, 내가 아니잖아요... 라고 말하면서.... 잠시 부끄러움을 피하고 연약함을 감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참혹한 십자가의 죽음의 이유와 목적이 바로 나에게 있음을 고백하면서.... 주님,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군요... 주님 나를 살리시기 위해 주님이 죽임을 당하셨군요...를 고백하면서 그 은혜와 사랑에 순종하여 엎드리는 것입니다.  인정하는 것입니다.  믿는 것입니다.   

 

3.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합니다.  그는 바다 건너서 먼 곳으로 도망을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큰 풍랑을 일으키셨습니다.  요나와 함께 배를 탔던 모든 사람이 위기에 빠졌습니다.  짐을 버리고 제사를 드리며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파도는 점점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오늘날처럼 과학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가장 안전한 날씨가 있을 때 항해를 했습니다.  그들은 예년에는 없는 갑작스러운 풍랑을 만났고, 분명 풍랑에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배 밑층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던 요나를 찾아냈습니다.  믿음이 없던 그들이 오히려 요나를 책망합니다.    

짧은 순간, 요나는 얼마나 당황하며 고민했을까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만난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요나였습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서 만난 문제를 바라볼 때....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사용하고, 배운 학문을 사용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과 생각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선지자였던 요나는 ‘믿음’을 사용합니다.  요나의 믿음이 바로 이 순간에 역사합니다.  그는 두려움에 빠진 사람들 앞에 나섰습니다.  이 풍랑이 자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바다에 임했고, 우리가 함께 죽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요?  사람들은 당황합니다.  당신 한 사람에 대해 신이 진노하셔서 이렇게 풍랑을 사용하신다면.... 우리가 당신에게 해를 입히면 당신의 신은 우리를 벌할 것인가?  그들은 더욱 두려워합니다.  이때 요나가 말합니다.  이 모든 문제는 나 때문이며, 나를 바다에 던지면 당신들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나를 던지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요나서를 예수님을 예표하는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장면이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까?  물고기 뱃 속에서 3일동안 있다가 육지로 나오는 일 말입니까?  물론 그 장면도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나서의 가치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책임지려는 선택에 있습니다.  요나는 “나는 아니지요.”라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제자들 곁에 서서 “바로 나 때문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나 때문에 죄와 악과 거짓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니느웨는 멸망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살지 않아서 세상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단 한 사람입니다.  요나가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은 책임과 자기 헌신에 있습니다.  세상의 풍랑이 나의 책임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내가 헌신합니다.

 

4. 우리 시대, 요나의 선택은?

 

성도 여러분!  요나는 많은 논란과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선택들을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매일 만나는 문제 속에서... 때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때로 문제에 고통당하는 사람으로, 때로 나 자신이 문제인 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과 같습니다.  우리의 이웃의 문제, 시대의 아픔, 교회와 성도들의 연약함에 대해 “나는 아니지요.”  “내 책임은 아니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면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니느웨와 나는 상관이 없기 때문에 저 멀리 다시스로 도망갈 수 있는 것이고, 그들의 회개와 구원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분노하고 섭섭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시대 요나의 일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요나서’를 읽게 하십니다.  

 

요나서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결국 그는 한 시대를 감당하는 선지자로서 사명을 감당했다는 것이고, 끝까지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지만 한 시대를 책임지는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는 아니지요?  나는 하지 않겠습니다.”가 아니라 “바로 나 때문입니다.  내가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사람이 선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불순종하는 때가 있어도.... 하나님의 때에 삶을 던져 순종하는 사람이 우리 시대에 요나가 되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문제 많은 세상에서, 문제 많은 삶을 살며, 날마다 일렁이는 풍랑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요나의 시대와 예수님의 시대에 와글와글... 두려움과 염려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마치 우리들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나 때문이며 내가 감당할 몫이라고 선언하는 요나의 믿음과 담대함을 칭찬합니다.  우리 시대에 요나가 보고 싶습니다.  요나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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