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6.30 구원은 여호와께 있습니다 | 김나래 | 2024-06-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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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6. 30.
* 본 문 : 요나서 2장 1-10절 말씀 * 제 목 : 구원은 여호와께 있습니다.
먼저 사진을 한 장 보실까요?(사진1) 지난 주에 주종화 성도를 심방했을 때의 사진입니다. 작년에 주종화 성도를 처음 심방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항상 누워 있었습니다. 몇 달 전에 침대를 조작해서 앉아있는 훈련을 시작했고, 이제는 스스로 자신의 신체를 사용해서 앉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앉아서 1시간 가까이 잘 버티고 있습니다. 제가 몇 주 전에 30분을 앉아 있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많이 건강해진 것이고, 신체의 여러 부분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본인이 의사를 표현하는 것도, 표정으로 말하는 것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의 제목을 주신 대로 먼저 이곳에 와서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예배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는 주종화 성도를 심방할 때마다.... 저는 두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한 어머니는 저의 어머니입니다. 제가 3년 전에 갑상선 암 판정을 받고, 한국으로 가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사실 어머니께 제가 수술을 받은 모습을 보여드리기 부담이 됐었습니다. 장모님께도 마찬가지여서 실은 양쪽 부모님께 암이 발견되었다는 소식과 수술 일정에 대해 아주 늦게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하지만 3일간 입원을 하고, 퇴원하고 지낼 곳이 마땅치 많아서 결국 어머니께로 갔습니다. 어머니는 딱히 제게 무슨 말씀을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눈빛으로 알고 말투로 압니다. 어머니께 많이 죄송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생각날 때마다 주종화 성도를 기억하고, 주종화 성도를 위해 기도할 때 마다 그 마음을 기억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또 한 어머니는 주권사님입니다. 사진에서도 보셨겠지만 우리 권사님 늘 웃고 계십니다. 아들의 병실에서도 씩씩하십니다. 성도들의 기도와 목회자의 심방을 기뻐하십니다. 아직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들이 마음 아프지 않도록, 미안하지 않도록 항상 밝고 씩씩하게 잘 견디고 계십니다. 희망을 잃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우리는 다 압니다. 우리 성도들의 기도와 사랑이 우리 권사님을 더욱 담대하게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1. 하나님, 왜요?
우리가 이런 고난들 앞에 늘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 왜요?”입니다. 이 질문은 욥에서부터 나오미와 다윗에게 계속되었고, 선지자들에게 계속되었으며, 예수님의 시대에 제자들이 던지는 질문이었고, 초대교회와 성도들의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요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할 줄 압니다.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합니까? 라는 질문에 신은 왜 너라고 그런 고통에서 제외되어야 한단 말이냐...? 고 대답한다고 하지요. 하나님이 정말 우리에게 그런 대답을 주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솔직히 말씀 드리면.... 크게는 아니었고, 살짝....아주 살짝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 왜 제게 집안에 없는... 상상하지도, 듣지도 못했던 암이라는 질병을 주십니까? 담대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가족들과 성도들에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혼자 있는 모든 시간에 하나님, 왜....라는 질문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권사님을 보면 같은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 왜 권사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그동안 권사님이 살아온 삶의 여정을 사람들은 다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아실텐데.... 우리보다 자세하게 모든 것을 아실텐데.... 이제 권사님 인생의 황혼에 왜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까? 권사님이 하나님께 질문하실 수 있고, 권사님을 위해 기도하는 우리가 기도와 함께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주인공 요나도 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2. 요나의 질문
요나는 한 때 자신과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를 했던 것 같습니다. 요나가 당시에 했던 실수는 오늘날 우리들도 자주 하는 실수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느끼는 감정과 품은 생각을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대단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맞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실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몰라요!” 뭐 이런 말들입니다. 우리가 유년주일학교에서 자녀들을 가르칠 때 자주 쓰는 말이기도 하고, 좀 죄송하지만.... 권사님들이 잘 쓰시는 말이기도 합니다. “집사님,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싫어하셔!” 뭐 이런 말들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집사님이 그렇게 하는 것이 내게 불편하고 하나님도 싫어하실 것 같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한 시대, 한 민족을 품은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영성의 깊이나 불타는 사명감에 대해서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그의 열정과 열심, 소명과 자기 확신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대해 생각의 분열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전에 이스라엘에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전했고, 진노를 전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일치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의 생각과 너무 다른 명령을 주십니다. 이제 막 제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당황합니다. 나는 분노하는데 하나님은 긍휼하게 여기시고, 나는 책망하는데 하나님은 용서하시며, 나는 증오하는데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나는 심판하고자 하는데 하나님은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거리를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다시스를 선택했습니다. 당시 세계관의 끝인 지중해 끝으로 도망가려 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하나님이 먼저 보여주신 요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의 거리에 대한 반응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다르다구요? 그렇다면 이제 내가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드리지요.....라고 하고 그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것입니다.
3. 하나님과 함께 하는 법
자, 하나님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품고 명령하지 않은 곳으로 떠나는 요나를 사랑하실까요? 만일 하나님이 요나를 ‘다른 생각’의 이유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또한 늘 하나님과 다른 생각, 다른 마음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품고 배우기를 원한다고 하지만.... 내가 변해서 하나님의 뜻과 같은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내 뜻과 같은 결정을 해주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대부분.... 나의 변화를 주저하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요나 또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과 다르다고 하시니.... 하나님, 나는 다시스로 갑니다. 그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보여드리지요. 그는 배 밑창으로 가서 잠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나를 사랑하실까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하나님과 다른 생각, 다른 가치, 다른 마음을 품고 살아가도록 내버려주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같은 마음과 생각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요나 또한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첫째는 고난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의 모든 고난은 그들이 하나님과 사귀는 방법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만납니다. 요셉은 형제들이 원수였습니다. 모세는 80년의 긴 여정을 통해서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녔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잔을 들어야 했습니다. 다니엘은 이방 나라에 충성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바울은 자신의 죽음까지도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그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각과 달랐던 자신의 생각을 소멸시키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주권사님과 주종화 성도에게도 같은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질병이라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유익이 이 가정과 성도에게 함께 하기시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한 이 가정 뿐만 아니라 우리 남장로님과 오장로님, 그 외에 때로 질병으로, 사고로, 관계로 어려움을 당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요나의 유익이 있기를 바라고, 모세의 유익이 있기를 바라고, 시편의 시인의 유익이 있기를, 사도 바울의 유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다른 생각과 마음을 품은 성도들을 위해 사용하시는 두 번째 방법은 기도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기도하는 요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요나의 기도는 죽음 가운데 드리는 생명의 기도입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드리는 기도, 여러분은 상상하실 수 있습니까? 요나가 위대한 선지자인 것은 그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상상합시다. 수많은 사람들이 풍랑에 울부짖고 두려워하고 요나를 원망합니다. 요나는 이 모든 문제가 자신 때문임을 고백하고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요나를 던졌습니다. 여러분이 요나라면.... 언제까지 정신을 차리고 버티실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연약한 우리는 “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하기를 했지만 정말 사람들이 던지려고 할 때 도망갈 수도 있고, 발버둥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정작 바다에 던져질 때.... 허공에 내 몸이 떠서 떨어질 때, 차가운 바닷물에 내 몸이 빠져갈 때.... 깊은 물속에 잠겨갈 때,... 그리고 커다란 물고기가 나를 삼킬 때.... 이 어느 한 부분에 아마 정신을 잃을 겁니다. 어떻게 맨 정신 똑 바로 차릴 수 있겠습니까? 고난이 휘몰아치고 연이어서 시련이 다가올 때... 우리는 아득하게 정신을 잃고,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허우적거리거나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를 통해서 자신이 선지자임을 보여줍니다.
4. 구원은 여호와께 있습니다.
그는 먼저 회개합니다. 하나님, 내가 교만했습니다. 내가 감히 내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이 같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마음과 다른 계획을 말씀하셨을 때 분노했습니다.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요나는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해주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내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생각과 같은 삶을 살기로 결단합니다.
그리고 그가 고백합니다. 구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전에는 이스라엘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은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했고,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고난 가운데 그가 깨닫습니다. 구원은 이스라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이 가는 곳에 구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곳에 구원이 있습니다. 구원과 회복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가 이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그는 믿음을 회복하고 예배를 회복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움직이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 뜻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임합니다.
요나와 하나님의 교제가 회복됩니다. 이 교제의 정도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이전에도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그는 하나님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품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나의 생각과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 일치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합니다. 비로소 하나님은 그를 뭍으로 내려놓으시고,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 일치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날마다 문제 많은 세상을 삽니다. 세상이 우리 앞에 놓아두는 모든 문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고 우리의 인격보다 크고 우리의 능력을 넘어섭니다. 지중해에 휘몰아친 풍랑입니다. 하나님은 그 풍랑으로 인하여 우리를 더욱 가까이 만나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그렇게 품어주십니다. 내 힘과 의지로 살았던 인생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구원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를 돌이켜 자신의 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합시다. 하나님의 온전케하심과 화평케 하심이 성도 여러분들의 가정과 삶에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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