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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4.2024 "복음을 들고 산 위에 서다" 김나래 2024-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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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 : 나훔 1장 15절

* 제 목 : 복음을 들고 산 위에 서다.

 

‘이해인 수녀’라는 분이 있습니다.  좋은 글을 많이 쓰시기 때문에 대부분 그 이름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 분이 자신의 인생을 조명하면서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인생이란 매일매일 산을 오르내리는 것입니다. 하나의 산을 간신히 넘으면 그보다 더 높은 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매일매일 크고 작은 산을 오르내리게 하시는 이유는 인생에서 가장 크고 높고 결정적인 ‘마지막 산’을 성공적으로 오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그 운명적 마지막 산을 오르기 위한 연습으로서 일상의 삶 속에서 작은 산들을 계속 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여러분에게 넘기 어려웠던 산이 있습니까?  혹은 지금도 힘겹게 마주하고 있는, 두려움과 주저함으로 만나는 산이 있습니까?  너무 엄청나서 넘기를 포기했던 산이 있습니까?  그 산을 넘어섰더니 마주친 더 높고 거친 산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도 오르고 있는, 올라야 하는, 오르고 싶은 산이 있습니까?  

 

1. 복음이란 무엇인가?

 

저는 지난 주까지 요나서와 나훔의 시대에 선포된 복음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중에서 나훔과 이사야와 로마서에 함께 인용된 말씀을 나눈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나훔 1:15와 이사야 52:7, 그리고 로마서 10:15에는 복음과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한 공통의 기억을 말하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나훔 1:15)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5)

 

그들의 공통된 기억은 우리가 즐겨 찬양하는 것처럼 “복음을 들고 산 위에 선 하나님의 사람들, 산을 넘는 그들의 발걸음이 참으로 아름답고 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함께 전하는 복음은 요나와 나훔처럼 이방을 향한 심판과 구원의 말씀이기도 하고, 이사야처럼 포로 귀환의 복된 소식을 알리는 말씀이기도 하고, 로마서처럼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각 시대에 반드시 선포되고 가르쳐야 할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 세 말씀들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은 각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이 말씀을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는 이 말씀들을 듣기를 원했을까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생각은 그들의 소원과 필요와 일치했을까요?  교회와 성도에게 복음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복음에 합당한 생각, 복음을 기뻐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요? 

 

성도 여러분!  복음에 대해 이해하실 때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복음은 우리의 삶에 상황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핵심적인 복음은 우리 삶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재해석되고 창조적으로 적용됩니다.  저는 ‘복음의 핵심’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상황적’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 두 단어는 복음을 이해하는 두 극단적인 입장이면서 서로 조화되어야 하는 입장입니다.

 

복음을 설명할 때 십자가에 집중한다면 복음은 ‘사람이 구원 얻기 위해 믿어야 하는 메시지’입니다.  죄인들을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잘 설명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마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고전 15:1-5)

 

하지만 복음을 설명할 때 교회가 세상을 새롭게 하는 복된 소식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와 구원이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설명해야 합니다.  즉 “구원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십자가의 은혜를 설명해야 하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를 물으면 변화시키시고 새롭게 하시는 십자가의 능력에 대해 설명해야 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바꾸는 십자가의 능력은 예수님의 사역을 시작하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눅 4:18)  하나님과 일치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와 교회는 세상에 대해 증거해야 할 복음이 있습니다.  복음과 구원의 연관성을 묻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역할과 복음을 받은 자의 사명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2. 복음, 산 위에 서다.

 

당연히 복음은 이 두 가지를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먼저 전해야 할 복음은 첫 번째 십자가의 은혜에 관한 것이라면, 이미 믿는 우리들...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증거되어야 할 복음은 십자가의 능력에 관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 복음은 하나님의 언약의 능력으로 증거되었습니다.  예레미야에서는 새언약으로, 이사야에서는 어린 양의 언약으로, 나훔에서는 유다를 비롯한 모든 이방에 증거되는 새로운 복음으로 증거되었습니다.

 

문제는 복음, 즉 이 복되고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과 믿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데 있습니다.  복음은 복음에 충돌하는 많은 삶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든, 십자가의 능력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초대교회의 시대에 유대인들은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했을까요?  그들에게는 유대주의라는 그들만의 특권의식이 있었고, 그것은 복음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산맥과도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제 아무런 넘어야 할 산도, 건너야 할 강도 없는 신앙생활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끊임없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십자가의 능력에 대해 설교했고,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일에 대해 설교했으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것을 설교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한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가치를 변화시키고, 삶을 바꾸며, 관계에 변화의 열매를 만들고, 당시 제국 로마의 절대적 권위를 무너뜨리게 됩니다.  다만 이런 과정을 만드는 일은 복음을 받은 성도와 교회가 넘고 또 넘어야 하는 산이며, 산맥이며... 끊임없이 걷고 또 걸어야 하는 광야이며, 늘 새롭게 만나는 강물이기도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많이 설교했던 오네시모와 빌레몬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한 때 복음을 만났고 구원의 기쁨을 노래했던 성도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복음을 들고 높고 거친 산을 마주합니다.  노예였던 오네시모가 그 시대, 노예제도라는 높은 산을 넘어서.... 죽음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의 산을 넘어서 화해와 평강의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귀족이며 노예의 주인인 빌레몬은 노예제도가 만들어낸 특권의식과 이기심의 산을 넘을 수 있을까요?  복음이 그들에게 임하고 복음의 은혜로 살아갈 때 그들은 각자 넘어야 할 산맥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삶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3. 전할 것인가?  전함을 받을 것인가?

 

그래서 다시 여러분께 묻습니다.  복음을 들었고, 복음으로 살기를 원하는 여러분 앞에 놓인, 복음에 충돌하는 산은 무엇입니까?  혹은 산을 오르기는 했는데.... 넘어서기는 힘든.... 여러분들만의 산은 무엇입니까?  오네시모와 빌레몬이 그 시대의 높은 산을 넘어서야 했다면 오늘 우리 시대에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은 무엇입니까?  

 

어쩌면 오늘날 복음이 가장 필요한 곳은 교회일지도 모릅니다.  복음은 성도들에게 더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십자가의 은혜, 구원의 은혜에 집중해왔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의심하지 않는 일에 집중해왔습니다.  그랬더니 복음은 딱.... 산 위에만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임한 복음이 내 삶의 영토에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임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참 오래 믿었는데,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가 내 삶에 철철 흘러 넘치는데.... 나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교회로 말미암아 지역사회와 시대가 복음적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복음의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 날마다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 복음의 영향력은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의 산에 오르는 일까지만 하는 것 같습니다.  

 

구원의 기쁨을 맛보고 느끼는 은혜의 산에 올랐다면.... 이제는 그 복음을 들고 그 산 너머에 있는 십자가의 능력이 인도하는 삶의 영토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영토는 먼저 나 자신일 수 있습니다.  오네시모와 빌레몬이 가장 먼저 넘어야 할 산은 바로 자기 안에 있는 두려움과 이기심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내가 늘 비슷한 문제로 갈등을 경험하고 있다면... 나는 아직도 복음이, 십자가의 능력이 나 자신의 산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복음을 들고 관계의 산을 넘어야 하고, 세상의 산을 넘어야 하고,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세상으로, 아직 복음의 영향력을 경험하지 못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이사야와 나훔의 시대를 넘어서... 사도 바울과 로마의 시대를 넘어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복음을 받은 성도와 교회의 사명입니다.  내 안에서 나 자신의 산을 넘어야 하고, 나와 다른 사람들, 나와 세상의 관계의 산을 넘어야 하고, 세상이 만들어내는 가난과 슬픔의 산을 넘어야 하고, 부조리와 불의의 산을 넘어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세상에 전하는 성도와 교회의 삶이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다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4. 유다여, 교회여! 

 

여러분, 다시 이 세 말씀을 봅시다.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나훔 1:15)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5)

 

먼저 나훔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 말씀은 누구에게 선포되는 말씀입니까?  예, 유다백성들입니다.  나훔은 유다 백성들에게 절기를 지키고 서원을 갚는 삶을 살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평온할 때는 그들의 욕망과 우상을 섬기면서 절기와 서원을 잊었고, 환란의 때에는 힘들고 어려워서 절기와 서원을 잊었습니다.  삶이 지나치게 분주하거나 삶이 참 힘들어서 그들은 신앙적 일상을 살아가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환란의 때를 허락하시고 그들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배하는 삶을, 절기와 서원을 지키는 삶을 살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이사야와 로마서의 말씀은 복음의 두 가지 방향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에서 복음은 이방의 땅에서 예루살렘으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말씀은 시온, 즉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이 복음으로 회복되어야 비로소 세 번째 로마서의 말씀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이 증거될 수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가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고, 십자가 복음의 변화의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가 복음을 들고 자기 안에 있는 산을 넘고, 관계의 산을 넘고, 사회와 역사의 산을 넘어야 합니다.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세상이 시온을 향해서 안타깝게 외칩니다.  이 시대가 복음을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아름다운 발걸음을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교회와 성도가 이 사명으로 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 발걸음을 아름답다고 칭찬하시고 그 발걸음이 가는 곳에 하나님의 기쁨을 함께 전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발걸음.... 복음을 받고 믿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발걸음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산을 넘고 있습니까?  산을 넘어서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전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발걸음을 기쁨으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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