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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1.2024 하나님, 우리와 함께 김나래 2024-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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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 : 스바냐 3장 17절 말씀

* 제 목 : 하나님, 우리와 함께

 

 23.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구)23장] /  438. 내 영혼이 은총입어 [(구)495장]

 

매년 이 맘 때가 되면 비슷한 주제로 이메일이 쏟아져 옵니다.  각종 기독교 출판사와 신문사들이 공통으로 하는 사업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 달력입니다.  우리 교회는 오래 전부터 매년 수고해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교회 달력을 스스로 제작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이 달력을 주문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회 달력은 크게 말씀 위주의 달력과 그림 위주의 달력으로 나뉘구요, 그림은 크게 풍경과 성화로 나뉩니다.  성화 달력 중에서 반드시 빠지지 않는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고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혹은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왜 이런 그림이 많이 사용되고 있을까요?  저는 상징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는 장면은 복음서에서 두 번 소개됩니다.  두 번다 제자들은 거의 죽음을 경험했고, 예수님은 평안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물이 배를 덮치는 때에도 주무시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서는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물 위를 걸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풍랑에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울부짖었고 절망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왜 많은 성도들이 기독교 역사에서 이 장면을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고 은혜를 받았을까요?  예수님의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고 파도를 다스리시는 대단한 능력 때문입니까?  만약 이렇게 대답을 한다면 우리는 성경의 한 면만 보고 다른 면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장면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심어주고자 하시는 말씀, 우리들에게 전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풍랑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집중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큰 풍랑을 만나도, 아무리 큰 고난과 시련 가운데 있어도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괜찮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풍랑이 우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평안이 우리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이름을 하나 주셨습니다.  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하나님의 마음과 눈물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우리가 매일 파도치는 삶을 살면서 왜 이 그림을 달력에 놓고 위로를 받는지 아시겠습니까?  세상은 우리를 거친 바람과 큰 파도 위에 놓아두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평안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1. 스바냐의 예언

 

오늘 우리가 만나는 스바냐 선지자는 유다의 선왕이었던 히스기야의 4대손입니다.  왕족이었던 그는 아마도 권력의 중심부에서 유다의 왕족들과 귀족들의 부패와 타락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예언은 매우 직설적이고 위엄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의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유다의 말기에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스바냐는 1장 1절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시대에 스바냐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스바냐는 히스기야의 현손이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그다랴의 손자요 구시의 아들이었더라”(1:1)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난 다음 2절에서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선언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땅 위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1:2)  스바냐 예언의 특징은 단순히 유다의 죄와 악을 책망하고 징계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유다를 비롯한 그 시대의 모든 나라들의 우상숭배와 악을 함께 책망하고 심판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앞에 그 어떤 나라도 자신의 의를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크고 높고 맹렬합니다.  3절에서 스바냐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내가 사람과 짐승을 진멸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땅 위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1:3)  이후 3장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당시 우상을 숭배하는 모든 나라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스바냐는 하나님의 진노만을 설명하고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책망하기만 하는 성경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진노 가운데 긍휼’이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에 대해 표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본마음을 만날 수 있고, 환란 가운데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집중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스바냐의 시대

 

성경에 나오는 모든 예언은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7세기, 북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했습니다.  유다는 형제의 나라 북이스라엘이 얼마나 처참하게 짓밟히고 멸망당했는지를 지켜봤습니다.  히스기야의 시대, 남유다 또한 앗수르에게 멸망당할 뻔 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위기를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유다는 우상숭배에 빠졌고, 죄와 악의 소용돌이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한편 북이스라엘을 잔혹하게 멸망시켰던 제국 앗수르는 점점 힘을 잃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이 신흥제국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스바냐는 이렇게 근동지방의 정세가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에서 활동한 선지자였습니다.  이 시기는 유다 역사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스바냐는 왕궁에 있으면서 요시야왕과 함께 했습니다.  요시야는 아주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서 31년을 왕위에 있었습니다.  B.C.640년부터 B.C.609년입니다.  요시야의 마지막 해 B.C.609년은 유다 역사에 아주 절망적인 시간이었습니다.  당시 남쪽의 제국이었던 애굽은 신흥제국 바벨론을 경계하고 앗수르와 연합하여 세력을 확장시키려고 했습니다.  애굽과 신흥제국 바벨론 사이에 유다가 있었고, 요시야왕은 그 사이에서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결정해야 했습니다.  요시야는 다소 무리하게 애굽과의 전쟁을 결정했고, 므깃도 전투에서 애굽의 느고왕에게 패배하고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 전쟁은 매우 중요합니다.  단순한 한 번의 패배가 아니라 유다의 종교개혁을 이끌었고 부흥과 회복을 주도했던 세대가 무너진 것을 의미했습니다.  유다는 패배주의에 빠졌고, 이후 율법의 회복과 신앙의 부흥은 없었습니다.  유다를 무너뜨린 애굽의 느고왕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은 BC605년 갈그미스에서 격전을 벌였고, 바벨론의 승리로 끝납니다. 이후에 애굽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완전히 물러갔고, 바벨론이 주변 모든 지역을 장악하고 다스리게 됩니다.       

 

스바냐는 이런 시기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선포합니다.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었던 요시야의 죽음... 유다는 절망하고 두려워했습니다.  모든 백성과 나라가 패배주의에 사로잡혔습니다.  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제국이 성장하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은 멸망당하는가?  왜 부흥과 회복을 주도했던 요시야왕은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는가?  우리가 살아나기 위해서 하나님 아닌 우상을 섬겨야 하는가?   

 

3. 픙랑이 아니라 예수님

 

다시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나고 있는 이 장면을 생각해 봅시다.  마태복음 8장에서 제자들은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마 8:27)하며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알기 때문에 제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높은 파도와 거친 바람 가운데서 제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신 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내가 너희와 함께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차피 세상은 풍랑 속에 있습니다.  아니 세상 자체가 풍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꾸 예수님의 능력만을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존재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한번 같은 상황에서 그들을 교훈하십니다. 마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배를 태워 바다로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풍랑을 만났고, 죽을 것 같은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그들이 절망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풍랑 가운데서 그들을 찾아오십니다.  바로 이때 우리는 아주 유명한 한 장면을 만납니다.  베드로가 풍랑 가운데서 다가오시는 예수님께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향해 바다로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었다고 했습니다.  자신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 집중할 때 그는 물 위를 걷습니다.  풍랑이 그를 삼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맹렬하게 덮쳐오는 파도를 봅니다.  그의 마음에 파도가 덮칩니다.  그는 결정해야 합니다.  파도를 볼까...?  예수님께 집중할까....?  그가 파도를 봤습니다.  두려움에 마음을 뺏깁니다.  파도가 그를 삼켰습니다.  그가 깊은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책망하십니다.  왜 의심했는가?  왜 파도를 봤는가?  왜 너와 함께 하는 나에게 집중하지 않았는가?  베드로가 풍랑이는 바다 가운데 집중해야 하는 것은 그의 시선에 가득한 파도가 아니라 그에게 믿음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4.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나님께서 역사적인 격랑 속에 휩쓸리고 있는 택하신 백성들에게 스바냐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열방의 모든 나라를 책망하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귀한 복음을 허락하십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그들에게 언제 어떻게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실 것인지를 말씀하지 않습니다.  스바냐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스바냐는 먼저 ‘너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은 ‘너의 가운데’ 계십니다.  성도의 삶 한 가운데 계시고, 성도와 성도의 관계 속에 계시고, 성도가 사는 세상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그들이 연약하고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살 때에 가장 먼저 눈물 흘리시고, 가장 깊이 고통을 느끼십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눈물과 아픔의 자리에 가장 먼저 임재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십니다.  사람은 구원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능자이십니다.  사람은 사람의 죄와 악을 극복할 수 없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사랑하고 구원하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 구원하시는 능력이 됩니다.  

 

하나님은 성도와 교회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묵묵히, 잠잠히, 깊이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변화와 구원과 삶을 노래로 부르십니다.  우리가 완벽하거나 뛰어나거나 대단한 능력을 보여서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스바냐를 통해서 패배주의와 절망에 찌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시고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그들에게 거친 바람으로 몰아치는 애굽과 높은 파도로 몰아치는 바벨론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시고 구원의 계획으로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집중할 것을 권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같은 마음과 같은 음성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기뻐하고 노래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그 은혜와 사랑을 묵상하면서 오늘도 높고 거친 세상의 파도 속에서 넉넉한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초대교회와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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