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0.2015 주일예배 -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 na kim | 2016-01-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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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가복음14:50-52절 개역한글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2015. 12. 20. * 본 문 : 마가복음 14장 50~52절 * 제 목 : 기억과 함께 울다. - 12.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지난 주일까지 있었던 제직 수련회 겸 부흥 집회에서 교회가 은혜를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사랑하는 친구 목회자의 성장과 그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인할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아마도 장목사 사모님에 대한 간증을 인상 깊게 들으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 일에 대한 저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목사님이 시애틀로 가서 부교역자 생활을 3년 동안 하다가 시애틀에서 한 시간 남쪽에 있는 올림피아에 있는 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좀 어려웠나 봅니다. 부임한 지 3년 째 되던 해 사모님이 쓰러졌습니다. 체질에도 문제가 있었고, 과중한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했습니다. 3월경에 쓰러졌는데, 6월경에 퇴원을 했습니다. 그해 여름 저는 우리 가족들을 다 데리고 서부로 휴가를 갔습니다. 장목사님 가정과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습니다. 사모님은 많이 아파보였고, 별 말씀이 없었습니다. 말을 하기만 하면 실수를 하니까... 가능하면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4-5일을 함께 보내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11월에 장목사님은 그 교회를 사임했습니다. 사모님이 정상적으로 목회를 도울 수가 없고, 본인도 사모님을 돌봐야겠다는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실은 말 못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모님이 처음 쓰러졌을 때는 교회가 다 함께 기도하고 회개하는 분위기였는데, 퇴원을 하고 몇 달이 지나도 증세가 나아지지 않자 불평을 하는 성도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모님이 많은 상처를 받았고, 자녀들과 장목사님도 상처를 받았습니다. 사임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그 교회 성도들 중에 서너 가정과 시애틀에 있을 때 친근하게 지냈던 몇 가정이 목사님께 교회 개척을 제안했습니다. ‘소금과 빛 교회’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시작했고, 우리 교회도 1년간 재정 지원을 했었습니다. 건강한 교회로 성장하고 있는 중에 지금 섬기고 있는 교회, 즉 장목사님이 이전에 3년간 부교역자로 섬겼던 교회와 통합하게 됩니다.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은 불명예스러운 일로 조기은퇴를 하셨습니다. 사실 교회 통합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제게 상담을 요청했을 때... 참 좋은 일이기도 했지만 많은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장목사님이 개척한 교회야... 이미 모든 문제를 알고 시작한 교회이기 때문에 괜찮을 수 있지만, 이제 통합을 하면 큰 교회가 될텐데.... 그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사모님의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줄까....? 교회가 크면 사람들도 많겠고, 그 중에 몇 사람이 말을 만들면 상처가 크게 될텐데... 이제 겨우 안정되어가는 목회와 가정에 넘어설 수 없는 어려움이 닥치는 것은 아닐까...? 저는 흔쾌하게 통합하는 것이 좋겠다는 답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두 교회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통합했습니다. 1. 부끄러운 인생 그 전에... 기억을 더듬어 보면, 지금으로부터 5-6년 전, 그러니까 교회를 개척한 지 2년 정도가 지났을 때였습니다. 서부를 방문할 일이 있었고, 일부러 시애틀로 갔습니다. 사모님이 얼마나 나았을까 궁금했습니다. 집에 도착했습니다. 사모님이 활짝 웃는 얼굴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사모님...오랜 만이예요... 아...아니지... 장로님.... 아... 아니 아니야... 집사님.... 하아... 그런데 누구세요?” 사모님은 그렇게 인사를 하고 잠시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눈에 눈물이 글썽였습니다. 옆에 있던 장목사님이... “아, 이응도 목사잖아. 그렇게 공부를 하고서도 몰라!”라고 했습니다. 사모님이 고개를 숙이면서 “그러게요... 내가 이래요....”라고 했습니다. 눈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습니다. 알고 보니 제게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몇일 전부터 우리 가족사진을 놓고 이응도 목사님, 박미란 사모님, 가일이, 성일이...하면서 공부를 했다는 겁니다. 저는 위로하려고 찾아갔다가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왔었습니다. 때로 우리의 인생에는 극복되지 않는 연약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반복해서 저지르는 실수가 있고, 이기고 싶고 넘어서고 싶지만 자꾸만 내 발목을 붙잡는 단점들이 있습니다. 때로 나의 비겁함과 나약함에 치를 떨 때도 있고, 때로 나 자신의 악함에 한 없이 실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질병과 고통 앞에 무너지는 우리들을 발견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좀 폼 나게, 좀 멋있게, 좀 자랑스럽게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데... 잘 안될 때가 많습니다. 먹고 사느라 바쁘고, 교회에서 오리혀 시험에 들기도 하고, 다른 사람과 자꾸 비교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은혜와 구원, 복과 사랑은 좋은데 희생과 헌신, 수고와 고통은 만나기 싫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눈물 흘리며 후회하며 자책하며 삽니다. 내가 그렇지... 그것 밖에 안되지... 후회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현장에 있었던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오직 마가복음에만 있는 기록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병정들에게 잡혔을 때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이 벌거벗은 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의 뒤를 따릅니다. 병정들이 그를 붙잡자 그는 벌거벗은 몸으로 도망을 가고 말았습니다. 마가는 왜 이것을 기록했을까요? 그는 이 개인적으로 발생한 일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 청년은 누구일까요? 2. “내가 그렇지..뭐...”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마가 요한’이라고도 불립니다. ‘마가 요한의 다락방’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베풀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승천하신 이후에는 성령을 기다리던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하고 기도하던 곳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에서 가장 빛나는 가문의 청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는 그에 대한 부끄러운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용기 있게 동행합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험난했던 여행길을 견디지 못했고, 1차 전도여행이 끝나기 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집과 교회로 돌아와서... 예수님의 성만찬의 흔적이 있고, 성령의 최초의 임재가 있고, 초대교회가 예배하고 있고, 세계 선교의 기지가 되는 그곳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제2차 전도여행이 시작됩니다. 아마도 그는 많이 반성하고 회개한 것 같습니다. 그는 자원해서 전도여행에 동참하겠다고 말합니다. 바나바는 그를 품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거절합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갈라서게 됩니다.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 방면으로 떠나고, 바나바는 다시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향했습니다. 내가 못난 행동을 해서 거절당했습니다. 선교에 대한 내 진심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선교의 두 지도자들이 갈라섰습니다. 여러분, 마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내가 왜 그랬을까? 왜 나는 이렇게 연약할까? 나는 왜 항상 이럴까?” 자책하며 가슴을 치지 않았을까요?
3. 그의 변화 이후에 사도행전은 바나바의 선교 여행과 마가에 대해서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도 바울과는 이제 원수처럼 되지 않았을까요? 재미있는 것은 이후 마가에 대한 기록은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등장합니다. 골로새서 4장 10절에 보면 놀랍게도 마가는 로마의 감옥에서 사도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바울은 마가가 자신에게 큰 위로가 된다고 말합니다. 같은 시기에 골로새에 살고 있던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도 마가의 안부를 전합니다. 성도 여러분! 왜 바울은 골로새교회와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마가를 언급했을까요? 아시다시피 빌레몬서에 등장하는 또 다른 한 사람은 오네시모입니다. 빌레몬의 종이었는데, 큰 피해를 입히고 도망갔다가 사도 바울은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회개하고 변화된 삶을 결단합니다. 도망간 노예는 목숨이 주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특별히 오네시모처럼 주인에게 피해를 입히면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지금 바울이 준 두개의 편지를 가지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디로 말입니까? 주인인 빌레몬에게로 갑니다.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를 함께 전달합니다. 왜냐하면 골로새 교회는 빌레몬의 집에서 모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두 편지는 모두 빌레몬의 손에서 개봉되고 읽힙니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기를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몬 1:11)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오네시모의 신뢰할만한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부탁하기를 그를 용서하고 영접하여 형제처럼 대해달라고 했습니다. 종으로, 노예로, 죄인으로 대하면 여전히 죄 많은 노예로 살겠지만, 이제 주 안에서 한 형제요 동역자요 하나님의 자녀로 대하면... 그를 품으면 그의 모든 허물보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역사하여 그 또한 빌레몬과 같은 하나님의 좋은 일꾼이 될 것이라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다른 서신서와는 달리 골로새교회와 빌레몬에게 보내는 두 편지에 공통으로 한 사람, 마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나와 함께 있고, 마가가 안부를 전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어떤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다 압니다. 마가 요한의 집은 워낙 유명합니다. 마가 요한은 초대교회의 소위 성골입니다. 그런데 그가 사고를 쳤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배신하고 선교 여행지에서 돌아가 버렸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그 철없는 청년 때문에 갈라섰습니다. 초대교회의 성골에서 초대교회의 골칫덩이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선교 역사에서 마가가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바울이 마가를 언급합니다. 마가가 다른 곳이 아닌 로마의 감옥에서 나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내게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그가 너희 교회와 빌레몬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그는 이전의 그 모습 그대로일까요? 아니면 변화되었을까요? 그렇습니다. 마가는 크게 변화되었습니다. 이미 초대교회 선교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바울과 함께 감옥에서 고난당하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13에서 그를 ‘내 아들 마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스라엘을 떠나 로마를 비롯한 이방세계에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이때 마가가 베드로와 동행하면서, 베드로의 복음사역을 결정적으로 도왔습니다.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바나바와 베드로가, 그리고 사도 바울과 교회가 함께 협력하여 가르치고 섬기고 도왔더니... 초대교회의 꼴통에서 동역자요 위로자로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4. “내가 이래요, 내가....” 지난 2014년 3월에 장목사님이 시무하는 훼더럴웨이 중앙 장로교회 설립 23주년 기념 부흥 집회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3년 만에 사모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교회를 통합하고 난 다음 많이 힘들었을 텐데 병세가 더 악화되지 않았는지 걱정되었습니다. 집에 들어섰습니다. 사모님이 생글거리며 나왔습니다. 그리고 씩씩하게 제게 인사하셨습니다. “사모님.... 아니고... 음... 장로님... 아니아니고... 목사님... 그래, 이응도 목사님이죠?” “예, 사모님, 저 이목사입니다.” 그랬더니 사모님이 깔깔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고... 목사님... 제가 이래요. 아직도 이래요....하하하....” 너무 놀랍고 기뻤습니다. 병세가 대단히 나아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신의 연약함, 자신에게 찾아온 불행에 대한 반응이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내가 이래요...”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었는데, 이제는 “내가 이래요..”하면서 깔깔깔 웃고 있었습니다. 제가 집회를 시작하기도 전에 사모님에게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집회를 하는 내내 도대체 무엇이 사모님을 저렇게 바꿔놓았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 교회에도 오장로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강사 식사를 대접하신다고 해서 만났습니다. 식사를 하는 중에 사모님이 수다를 많이 떠셨습니다. 사실 좀 말에 질서가 없습니다. 그런데 식사를 하는 장로님과 권사님, 그 외에 성도들이 너무 열심히, 잘, 박수도 치고 깔깔대기도 하면서 들어주고 있었습니다. 고맙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해서 오장로님께 말했습니다. “사모님이 저렇게 편찮으신데 교회가 이렇게 잘 대해주시니까 참 좋습니다.” 그랬더니 오장로님이 시크하게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그러면 아픈 사람을 이렇게 대해야지...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원래 저분이 저런 분이 아니었어요. 얼마나 깔끔하고 정확하신 분인데... 우리가 다 알아요.” 다행히도 교회가 6-7년 전에 장목사님이 그 교회 부교역자로 섬길 때 사모님이 얼마나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교회를 섬겼는지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사모님의 오늘의 문제를 불편함이나 비난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용납하고 도와야 할 문제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너무 감동적이고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집회 마지막 날 제가 교회와 성도들에게 저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많이 걱정하면서 왔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제가 집회를 통해서 은혜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사랑하는 친구의 가정을 대하는 모습에 오히려 은혜를 받고 간다고 했습니다. 목회자의 가정에 찾아온 연약함을 불편함과 수치스러움으로 해석하지 않고, 품고 도와야 할 문제로 받아들여준 것이 너무 고맙다고 했습니다. 이제 이 교회에 출석하는 그 어떤 사람의 연약함과 부족함도 품을 수 있는 능력있는 교회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교회가 앞으로 100년을 사용하고도 남을만한 풍성한 은혜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마가는 지금 자신의 기억 속에 숨겨두었던 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구술을 받아 적으면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아픈 기억을 고백했을 때... 마가는 자신에게도 고백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차마 도망가지 못하고... 홑이불을 몸에 감고 뒤를 따라가다가..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서 잡힐 뻔했어요. 너무 무서워서 홑이불을 버리고 알몸으로 겨우 도망을 치고 말았어요. 이 기억 때문에 늘 괴로웠어요. 바울과 바나바, 선교팀을 버리고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자기 때문에 바나바와 바울이 다투고 갈라설 때도... 예수님을 버리고 알몸으로 도망쳤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사람들이 다 나를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것 같았어요. 내가 그렇지...뭐... 내가 그런 놈이지..뭐... 나를 자책하고 또 원망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버려두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사람들이 나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교회가 나를 품어 줬어요. 바나바의 바나바의 방식으로 나를 사랑해줬고, 바울은 바울의 방식으로 나를 훈련시켰고, 베드로 선생님은 또 선생님의 방식으로 나를 품어주셨어요. 바나바와 바울 선생님의 동역자가 되었고, 교회의 위로자가 되었으며, 베드로 선생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 되었어요. 지금 선생님 곁에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그리고 주님 오시기까지 존재할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성경을 기록하고 있어요.” 여러분, 그는 지금 웃고 있을까요? 울고 있을까요? 울 수도 있고, 웃을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이전처럼... 내가 그렇지... 그런 놈이지... 하며 자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이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나는 이렇게 부끄럽고 연약한 사람이었어요. 나는 살겠다고 수치스럽게도 벌거벗고 도망을 쳤어요. 그런데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용납하셨어요. 교회가 품었어요. 성도들이 사랑해줬어요. 나를 책망하고 손가락질하고 원망하지 않고... 나를 이해하고 품어줬어요. 그래서 이렇게 성경을 기록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교회와 성도들을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섬길 수 있었어요.” 2016년에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서 마가를 통해서 주셨던 이 은혜를 개발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연야함이 부끄러움이 되지 않고, 부족함이 수치가 되지 않는 교회.... 더 연약할수록 품고 섬겨야 할 이유가 되고, 더 부족할수록 사랑해야 할 이유가 됨을 고백하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에 허락하신 사랑과 은혜가 넘쳐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연약한 인생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넘쳐나는 가정과 교회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함께 토론할 질문 1. 내 삶에 잘 극복되지 않는 연약함이 있습니까? 반복되는 실수가 있습니까? 벗어날 수 없는 상처와 기억이 있습니까? 어떤 것들입니까? 2. 1차 전도 여행에서 중도에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마가의 심정을 상상해 봅시다.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혹시 우리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까? 3. 마가 요한을 변화시킨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이 그의 변화를 위해 사용하신 도구들을 생각해 봅시다. 4. 내가 용납받고 싶은 연약함이 있습니까? 교회와 성도들 중에서 기억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좀 더 품고 용납하고 사랑한다면 변화 가능한 사람들을 생각해 봅시다. * 함께 기도할 제목 1. 2016년에는 더 많이 사랑하고 품고 이해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교회가 되게 하소서. 2. 마가 요한 같은 변화가 있게 하셔서 하나님의 좋은 도구로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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