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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땅을 기경하라(2)- 공의와 인애 na kim 2016-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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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호세아10:12절 개역한글

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16. 1. 10.

 

* 본 문 : 호세아 1012절 말씀

* 제 목 : 묵은 땅을 기경하라.(2) - 공의와 인애

 

가끔 사람을 만나다보면 ... 이 사람은 지나치게 자기 편이다...’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편이 아닌 사람이 어딨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지나치게 자기 편인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습니다. 그만큼 자신을 객관화시킬 수 없다는 말이면서 자기중심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 논리에 충실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읽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술을 못끊는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술로 인해서 어려운 일이 자꾸 생기고 가족들이 함께 고통스럽게 책임을 지는 일들이 많은데도 그 분은 술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분에게는 정말 술을 마실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왜 그렇게 많은지요....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때문에 늘 술을 찾습니다. 그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나서, 서운해서, 좋아서, 기뻐서 술을 마십니다. 가정이 행복해서 마시고, 슬퍼서 마십니다. 사업이 잘되니까 마시고 안되니까 아십니다. 요즘은 아내가 말을 안들어서 마시고, 장성한 아들들이 아버지를 무시해서 마십니다. 그 분이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수천, 수만가지입니다. 그런데 술을 마시면 안되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술 때문에 지금 사업이 망했고, 가정이 무너지고 있고, 자신의 삶이 부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연예인이 그러더군요. 한 때 자신은 술잔이 아닌 술병을 들고 술을 마셨습니다. 왜 잔을 사용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잔도 유리요 술병도 유리인데 굳이 옮길 필요가 있겠는가?” 비 오는 날에는 꼭 술을 마셨습니다. “세상이 다 비로 젖는데 나 혼자 안젖을 수 있겠는가?” 눈이 오는 날에도 꼭 술을 마셨습니다. “비가 얼어서 눈이 되었는데 내가 술과 함께 녹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화창한 봄날에도 꼭 술을 마셨습니다. “꽃도 피었는데 내가 어떻게 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람이 부는 날에도 꼭 술을 마셨습니다. “바람이 부는데 술과 함께 좀 흔들려야 자연에 대한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수만 가지 이유로 술을 마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실 우리는 꽤 많이 우리 자신 편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이해해주면 좋겠고, 내 마음을 읽어주면 좋겠고, 내 편에 서주면 좋겠습니다. 내게 있는 연약함과 어리석음과 때로는 악함까지도 나의 선택이 아닌... 상황이 나를 그렇게 만든 것으로 이해해주면 좋겠습니다. 내가 좀 욕심을 부리고, 내가 좀 불의한 삶을 선택하고, 내가 좀 이기적으로 살아도... 나는 원래 의롭고 거룩하게 살고 싶은데 악하고 더러운 세상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심지어 예수님도 이 시대를 살면 나처럼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신앙으로 살지 못하고, 내가 배우고 믿고 알고 있는 믿음의 원칙대로 살지 않고,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많이 변질해버렸는데.... 그것은 다 세상이 나를 흔들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도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성장하지 않습니다. ~~~무 내 편이 되어 나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1. 묵은 땅

 

지난 주일 우리는 같은 본문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기경해야 할 묵은 땅, 그것은 먼저 아직 사용하지 않은 땅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가 있고 은사가 있는데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종과 같이 그것을 땅에 묻어두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자신의 관심과 뜻대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전히 그는 주인의 집에 살고 있고, 주인의 종이요, 주인의 것으로 먹고 마시지만.... 주인은 그에 대해 진노합니다. 그에게 허락된 달란트가 땅에 묻혀 있었기 때문이고 그에게 허락된 밭이 황무지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묵은 밭은 다른 것들이 심겨 있는 밭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말씀하신 가시밭에서 좋은 예를 볼 수 있습니다. 가시밭은 어떻게 보면 황무지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무엇인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밭에서 추수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 밭에서 거둘 수 있는 것은 가시와 엉겅퀴밖에 없습니다. 농부가 농사를 위해 씨 뿌리기 전에 먼저 뿌려진 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농부가 뿌린 씨가 성장하는 것을 가로 막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삶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뜻입니까?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은 욕심과 실패할 것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입니까? 나의 필요와 욕심이 내 기도의 중심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나라가 내 기도의 중심에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과 삶에 먼저 심겨진 것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음의 좋은 밭을 열매 없는 황무지로 만듭니다.

 

세 번째 묵은 밭의 가능성은 변화와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우리 자신의 견고한 껍질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자존심이나 성품이나 기질이나 이기심이나... 무엇이든 복음의 도전을 방어하는 논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서 ‘break up your unplowed ground’ 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쟁기질 하지 않은, 말씀의 쟁기의 날카로운 날이 내 속 마음과 속 사람을 파고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내 마음과 삶의 묵은 땅을 깨뜨려야 합니다.

2. 불의의 시대

 

호세아의 시대, 지금으로부터 2700년 전 북이스라엘은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거리마다 흥청거렸고, 그들의 번영은 영원할 것 같았습니다. 은혜였을까요? 축복이었을까요? 하나님이 그들의 시대를 탄식하십니다. 그이유가 4:7에 나옵니다.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4:7)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법정에 세우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4:1-2) 여기서 1절에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에서 사용된 논쟁이라는 말은 법적 용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법정에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둘째 삶이 범죄하고 타락했습니다. 42절에서 본 바와 같이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셋째 사회적 정의가 사라졌습니다.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그는 상인이라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속이기를 좋아하는도다”(2:6-7)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7:9-12)

 

불의의 시대, 죄와 악의 시대, 욕심과 욕망의 시대, 우상 숭배와 타락의 시대, 말씀이 사라지고 정의가 사라진 시대를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서 어떤 답을 주실까요?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3. “인애를 거두기 위하여!”

 

하나님은 본문에서 묵은 땅을 갈아엎고 심을 것과 거둘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심고 무엇을 거둘까요? 성경은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공의를 심어야 할까요? 공의의 열매는 왜 인애일까요?

 

인애를 거둔다는 말씀의 의미부터 생각해 봅시다. 먼저 본문에서 인애란 성경의 주제 가운데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헤세드라는 말인데요,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사랑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자비’ ‘인자’ ‘인애’ ‘선대(善待)’ ‘은총이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헬라어에서는 아가페로 번역됩니다. 이 사랑은 성경에서 크게 두 가지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첫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고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 즉 우리가 본받고 실천해야 할 사랑입니다.

 

각각 사용된 말씀들을 봅시다. 시편 1361절에서 26절까지의 경우에는 매절마다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인자로 번역된 단어가 헤세드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편 52:8, 역대상 16:34, 역대하 5:13, 에스라 3:11, 느헤미야 9:17, 예레미야 33:11 등 곳곳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사랑헤세드로 표현합니다.

 

호세아 66절에서 하나님은 나는 인애(헤세드)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헤세드의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어떻게 실천할까요?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2:20).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삼하 9:1) 여기서 은혜와 은총은 모두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삶의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실천되는 것입니다.

4. “공의를 심으라!”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땅에 살면서 헤세드라는 열매를 얻는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답은 무엇입니까? ‘공의를 심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righteousness)는 이미 오래 전에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의로울 수 있는 모든 조건과 자격을 잃고 말았습니다 의는 오직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3:10)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서 공의를 심을 수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를 자주 잘못 사용합니다. 비교적인, 상황적인, 관계적인 의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두 성도가 다툽니다. 어떻게 교회 안에서 성도 간에 분쟁이 있을 수 있냐고 물으면 서로를 블레임합니다. 저쪽이 악하기 때문이고 나는 의롭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자녀들 앞에서 다툽니다. 자녀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하는지를 물으면 서로를 손가락질합니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시대는 불의의 시대입니다. 이미 로마가 지중해 주변의 모든 나라를 정복하고 우상과 세상의 권력이 교회를 장악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여전히 자기 의를 주장합니다. 그들의 개인의 경건 생활과 하나님의 의를 혼동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킵니다. 스스로를 의롭게 생각했습니다. 식민의 시대를 살면서 분노와 패배감에 허덕이며 방황하는 민중들을 정죄하고 그들의 궁핍한 삶을 외면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그 비유 속에서 아마도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기 의를 주장할 것입니다. 그들이 해야 할 종교적인 의무가 있고, 그것은 적어도 그들 자신에게 있어서 강도만난 한 사람을 구하는 것보다 더 크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의로 포장된 비겁함과 이기심으로 발걸음을 바삐 옮깁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합리화하고 변명합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공의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성도와 교회가 묵은 땅을 갈아엎고 심어야 하는 공의는 바로 하나님의 의이면서, 내가 받은 사랑으로 타인의 삶에 의를 실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이 공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요? 유대인들의 전통 가운데 체다카라는 것이 있습니다. 유대인 가정에서는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작은 돈을 저금통에 모았다가, 그것이 차면 깨뜨려서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가난한 이웃을 돕기 위한 기부금으로 사용합니다. 그 저금통을 체다카라고 부릅니다. 체다카자선’(charity), ‘사랑으로 섬기는 선한 행위특히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체다카와 같은 어근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체데크혹은 세데크입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멜기세덱이라는 왕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왕을 번역하기를 ()의 왕라고 했습니다. ‘멜키는 왕이라는 뜻이고, ‘세덱’()라는 뜻입니다. , 그러면 같은 어근에서 어떻게 체다카체데크자선정의라는 두 가지 개념의 단어가 발달할 수 있었을까요? 유대인의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체다카에 그 답이 있습니다. 불의하고 불공정한 이 세상을 살면서 내가 받은 무한한 은혜와 사랑, 즉 헤세드를 이웃과 함께 나눌 때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의 관계 속에.. 이 땅에 씨 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질문으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첫째 그들은 왜 그랬을까요? 둘째 만일 그런 시대에 여러분이 태어났다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아마도 그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많은 말로 자신들을 변명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보니 그런 시대였고, 나 혼자 시대를 거스를 수 없었고, 가해자가 되지 않으면 피해자가 되고, 정의를 선택하면 나 또한 손해를 볼 것이고... 살다보니... 정신없이 살다보니 한평생 그냥 살았고.... 그들은 모두 자기 편이 되어...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편에 서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편에 서지 않고 자기 입장을 설명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일 우리가 그 시대를 산다면, 아니 우리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물으신다면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공의로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나의 삶에, 관계 속에, 내가 속한 사회에,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불의의 시대를 사는 사회적 약자들의 삶에도 하나님의 뜻과 사랑과 공의가 실현되도록 수고하고 헌신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를 심을 때... 우리의 삶아 차다카를 만들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관계와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열매를 풍성하게 허락하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반드시 기억하셔야 할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누구를 위해서 심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헤세드의 사랑와 은혜를 누리기를 원하는 우리들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의 대상인 우리들을 위해 실현되어야 할 가치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공의를 심고 인애를 열매로 거두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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