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나무 성경공부
5. 고통을 이기는 힘(롬 8:35-39)
1. 먼저 생각하기
최근에 만난 한 집사님은 생각만 해도 제 가슴이 답답해지는 분입니다. 그 분에게 어떤 잘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어쩌면 한 사람의 삶에 이렇게 불행이 마치 파도가 치듯 계속해서 밀려오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은 가운데 참으로 신실하고 바르게 살고자 노력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여전히 그분에게서 멀리 계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번은 그 집사님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언제쯤이면 이런 고통이 끝날까요? 하나님은 제게 얼마만큼의 인내와 믿음을 더 원하시는 것일까요?” 저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제 마음 속에는 “그만하면 됐습니다!”라는 시원한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그 집사님의 삶에 긍휼을 베푸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집사님의 마음을 만지시고 위로하셔서 좀 더 믿음 안에서 견고히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다가오는 고통에 대해서 우리가 쉽게 속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에 대해 하나님은 외면하고 있고 이 고통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절망 끝에 자기 혐오나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 거짓은 우리의 걱정과 근심 속에 숨어 있습니다. 성경은 걱정과 염려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세 번째 거짓은 내 삶에 있는 몇 가지 고통으로 내 삶에 넘쳐나는 축복과 행복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내 삶에는 더 많은 은혜와 축복이 있는데 몇 가지 어려움과 고통으로 자신의 인생 전부를 해석해버리는 어리석음을 자주 범합니다. 이러한 거짓들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함께 생각해 봅시다.
2. 주의해서 성경 읽기
1) “하나님, 언제까지입니까?”
일반적으로 우리가 고통 앞에서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외치는 질문은 대부분 ‘얼마나’ ‘언제까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얼마나 더 이 병을 견뎌야 합니까?”
“얼마나 더 경제적인 압박을 받으며 살아야 합니까?”
“얼마나 더 이런 결혼 생활을 견뎌야 합니까?”
“얼마나 더 이런 고통스러운 상황을 지내야 합니까?”
우리들의 이런 연약한 질문들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 말할까요? 예레미야의 고민과 하나
님의 응답을 함께 읽읍시다.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잊어버렸음이여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예레미야 3:17-25)
예레미야가 고통 중에 얻은 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여러분은 이 답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십니까?
2) 염려와 두려움
성경은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에 대해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걱정과 염려는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본성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 마 6:27
- 빌 4:6
염려가 곧 두려움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안전에 대한 염려는 현실적인 두려움이 되어 우리의 마음과 삶을 옥죄게 됩니다. 사탄의 가장 좋은 무기는 염려와 두려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균열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한 가지의 고통 > 천만 가지의 감사
사도 바울에게도 기도로 해결되지 않는 육신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후 12:7-10)
그가 집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집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3. 깊이 고민하기
어쩌면 우리의 고통 가운데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절망합니다.
나치 수용소에서 죽음을 기다리다가 가스실에 들어가기 직전에 살아난 정신과 의사 탁터 ‘빅토어 플랭클’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언제까지 자신과 유대민족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하나님께 질문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가스실에서 극적으로 살아나와 했던 고백이 있습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실까요?
“언제나 선택의 여지는 있다. 하루, 매시간 선택의 여지는 있다. 당신의 내적인 자유와 평안을 빼앗아 가려고 위협하는 환경에 굴복당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선택의 자유는 당신에게 달려 있다… 집단 수용소의 환경이 열악하고, 잠도 부족하고, 음식도 충분하지 못하고, 알수 없는 미래와 운명에 대한 심리적인 불안감도 크지만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나는 선택할 수 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내가 고통에 당당하게 맞서지 못할까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나는 집단 수용소에서의 삶에서 자주 내 자신에게 들려주었다. 이 말과 함께 고통과 죽음이 눈 앞에 펼쳐지는 집단 수용소에서도 마지막까지 나의 내적 자유와 평안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것을 결심하였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다리기로 결정합니다. “내가 저를 바라리라….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눈앞에 펼쳐진 눈물의 현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흔들지 못했습니다. 언제까지인지, 얼마나 더 견뎌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민족의 고난의 현실 앞에서 그는 하나님 안에서 기다리기로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평안이 그를 감싸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두려움과 염려가 그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믿음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것이 실제적인 고통일 때 우리는 믿음 안에서 담담히 그 고통을 우리의 가슴으로 안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고난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고통이 나의 염려나 걱정으로 만들어 진 것이라면 그것이 우리를 속이지 못하도록, 사탄이 걱정과 염려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지 못하도록 과감히 벗어 던져 버려야 합니다.
강철왕 카네기는 걱정과 근심으로 마음이 복잡해질 때 다음과 같은 4단계의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1) 지금 내가 염려하고 있는 실제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적는다. 가상의 염려를
제거한다.
2) 실제적인 문제가 되는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
지 적는다.
3) 내가 할 수 있는 일들 중에서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우선순위를 정한다.
4) 한 가지 씩 우선순위에 따라 차분히 실천한다.
카네기가 사용한 방법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진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염려나 걱정이 우리의 삶에 만들어 낼 수 있는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염려와 걱정을 이용하여 성도와 하나님의 관계를 깨뜨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발휘해야 합니다. 사탄의 전략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 때문에 마치 인생이 끝난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지금 당장 겪는 고통, 지금 당장 당하는 슬픔은 무거운 짐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거나 쓰러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집을 살 때 방 하나 좋다고 집을 사지 않는 것처럼, 차를 살 때 바퀴 하나를 보고 판단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부분이 전체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에는 눈물의 제목이었던 것이 감사의 제목으로 변화되었던 경험이 없으십니까? 바울은 우리들에게 좋은 예를 보여줍니다. 그는 고통에 집중하지 않고 받은 은혜에 집중했습니다. 고통이 오히려 은혜의 샘으로 변화되었습니다.
4. 적용하기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우리 삶에 만연한 거짓된 고난과 고통을 이길 수 있는 길이 이 말씀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35절에는 우리 삶에 현존하는 고통을 묘사합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고 했습니다. 만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말합니다. 그 정도가 어디까지일까요? 36절을 봅시다. “우리가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환란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로 말미암은 고통의 정도가 마치 도살을 앞두고 있는 양과도 같이, 무력하게 그저 당할 수밖에 없는 막막한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이 이 모든 아픔과 눈물의 현실 속에서 확신하고 또 확신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35절에서 고난의 현실을 열거하기 전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질문합니다. 그리고 열거하는 이러한 고난이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마치 도살할 양과 같이 죽음 직전까지 간다고 해도 우리는 그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7절에서 바울은 확신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의 힘으로 이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가 모든 고난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38-39절에서 다시 강조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고난뿐만이 아니라 때로는 영광도, 때로는 기쁨도, 때로는 성공까지도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번 확신합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 있을 때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을 떠나시면서 제자들과 교회에게 참 귀한 약속을 하나 주셨습니다. “볼
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우리가 고통 당할 때에도, 우리가 눈물 흘릴 때에도, 우리가 한숨 지을 때에도, 우리가 두려워 떨 때에도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 주님만이 우리가 고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길이 됩니다. 고난과 고통에 허우적거리다가 쓰러지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인간 고통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을 오히려 조롱하고 비웃었던 사도 바울의 고백과 권면을 함께 소리 내어 읽고 공부를 마칩시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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